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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의 무한책임 Feb 03. 2022

[한줄책방] 타인의 ‘검은 빵’이 주는 위로

레이먼드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케이크를 찾아가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 앤은 아들 스코티의 여덟 번째 생일파티에 쓸 케이크를 주문한다. 앤은 빵집 남자를 하찮게 본다.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이라며 속으로 무시한다. 스코티는 생일 당일, 등굣길에 자동차에 치여 뇌진탕을 당하고, 혼수상태인지 코마상태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 있다 결국 세상을 뜬다.      


그 와중에 앤의 슬픔과 고통을 알 리 없는 빵집주인은 생일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는 앤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한다. 자신과 자신의 노동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빵집주인의 분노를 알 리 없는 앤은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가 해일처럼 몰아치며 빵집주인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그것은 곧 슬픔이었다. 앤의 사정의 알지 못하고 분노를 표현했던 빵집 주인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앤 부부에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 갓 구운 따뜻한 롤빵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앤 부부는 빵집 남자가 건넨 롤빵을 먹고, 그가 건넨 검은 빵도 먹는다. 검은 빵은 뜯어먹기에는 힘든 빵이지만 맛은 풍부한 것이다. 앤 부부는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검은 빵을 삼켰다. 아마도 그 빵은 빵집주인이 늘 먹는 빵일 것이다. 달달하고 따뜻한 롤빵은 아니었던 것이다. 앤은 빵집 주인이 건넨 검은 빵을 먹으며 빵집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세상은 전과 같진 않으리라. 그것은 마치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 같은’ 느낌이리라.        

앤과 하워드는 미국의 중산층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안락하고 윤택한 삶. 하지만 어느 날 스코티의 사고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하워드는 스코티의 사고소식을 듣고 집으로 향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앤은 그 병원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슬픔에 잠겨있는 흑인가족을 만난다. 그 부부의 아들은 싸움이 일어난 파티현장에 있었다가 아무 이유 없이 칼에 찔리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결국 그 아들은 죽는다. 앤은 그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다. 은근히 경멸과 무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고통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고. 삶을 뒤흔들 정도의 슬픔. 이런 것들은 예견되지 않는다. 하워드 말처럼 그냥 ‘어떤 힘 같은’ 것이다. 속수무책인 그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위로다. 사실 둘러보면 우리 주위에는 그런 도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을 읽고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린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해골처럼 형체를 드러낸 추악한 철골과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이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천막 안에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가 닿을 수 있을까. 별 것 아니지만 이 글이 작은 위안이나마 되길 바란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


대성당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삶의 환희 


2.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따뜻한 음식으로 건네는 위로와 격려라고 생각했다. 그 음식이 비록 진귀하고 값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앤과 하워드가 진정 구원을 받은 것은 따뜻한 롤빵이 아니라 빵집주인이 일상에서 먹던 투박하고 거친 검은 빵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뛰어넘어 타인에게 가 닿는 하나의 불빛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먹는 것을 함께 먹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아들을 잃고 부모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먹는 그 음식은 온전한 것일 리 없다. 겨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그 거칠고 빈약한 음식을 나눠먹을 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대성당>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비롯해서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작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처음 떠오른 작품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들이었다. 그의 소설들은 연민과 안쓰러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에 대한 존엄, 인간애가 있다. 그래서 그 연민과 안쓰러움은 한낱 싸구려 동정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겪는 삶의 숙명, 고단함 그리고 알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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