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철의 <사람사전>
둥글둥글 사는 건 별로인 걸까?
1. 이 구절은 ‘동그라미’에 대한 단어 설명이다. 둥글고 모나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둥글둥글 사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나만의 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내 주변인들은 둥글고 모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 내가 가진 모서리와 덜 부딪히게 되니까.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둥글다는 것은 현자나 성자의 경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둥글다는 것은 자신의 모서리를 없애는 것이다. 진짜 고수는 어디에서도 눈에 띄게 튀지 않고 누군가와도 부딪히지 않는다. 겉으로는 수용하고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자신만의 그 뾰족하고 모난 모서리를 닳게 만들어서 없애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
어쩌면 성자의 동그라미 속에는 단단한 핵이 들어있는 것 아닐까. 모서리의 각도와 무게를 자신의 안으로 끌어당겨서 중력보다 더 무겁고 단단한 중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겉으로는 마냥 둥글둥글해 보이지만 이리저리 떠밀리지 않고 쓸려 다니지 않는 삶. 자신의 뾰족한 모서리를 지운 사람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
관찰과 사색, 애정이 담긴 사전
2. <사람사전>은 카피라이터 정 철이 지은 책이다. 총 1234개의 단어에 대한 해석이 담겨있다.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단어 해석도 있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들도 많다. 모든 단어마다 작가의 통찰력이 깊게 배어있다. 그냥 단순히 자신의 생각이나 감성만 담은 게 아니라 그 단어의 유래나 뜻을 배경으로 쓴 글도 있고, 요즘 시대 상황과 견주어서 풍자하거나 비유해서 쓴 글도 있다. 짧은 글이기에 쓰는 창작가의 고통은 더 했을 것 같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
#아빠 : 아버지의 역사 첫 페이지. 본문이 시작되기 전 머리말 같은 것. 이어지는 본문이 얼마나 어려울지, 얼마나 외로울지 아직은 모른다. 오래오래 모르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곧 본문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게 쉽지 않은 본문이다. 어려워도 읽어내야 하는 본문이다. 지겨워도 건너뛸 수 없는 본문이다. 아빠는 짧고 아버지는 길다.
#낫 : 물음표를 닮았다. 무심코 휘두른 물음표가 누군가의 마음을 베는 낫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 뭐 하시니? 어느 대학 나왔지? 올해는 결혼할 거야? 낫으로 싹둑 잘라버려야 할 물음표들.
#낙타 : 발바닥이 뜨거워 슬픈 짐승.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다. 등에 혹이 달렸는데도 사람이라는 혹 하나를 더 달고 사막을 걷는다. 낙타는 안다. 사람 발바닥은 사막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낙타가 아는 것을 사람은 모른다. 사람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연신 낙타의 속도를 꾸짖는다. 사람. 지구의 혹.
작가의 이런 해석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의일 리가 없든 사람마다 아빠나 낫, 을 생각하는 마음속 정의는 다를 것이다. 아마 그 누군가의 ‘사전’을 읽어내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고 사랑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사물을 이렇듯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2020년 봄에 구입하여 아껴가며 아침마다 읽었다. 그해 나에게 많은 인사이트를 준 책. 다시 읽어봐도 새로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