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1. 캐서린은 넬리(캐서린 집안의 보모)에게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처럼 절규하듯 말한다. 히스클리프가 자신(캐서린)보다 더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는 이유는 히스클리프가 출세하도록 도와주고 히스클리프를 학대하는 자신의 오빠(힌들리)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운명은 얄궂다. 그 현장에서 몰래 숨어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이 고백은 듣지 못하고, 그 말에 앞서 했던 이야기 ‘히스클리프와 결혼을 한다면 내 품위가 바닥에 떨어질 거’라는 말만 듣고 나가버린다. 캐서린을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 길로 집을 나가버린 히스클리프. 그리고 몇 년 후에 돌아온 그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언쇼 가를 향한 처절한 복수가 이어진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히스클리프의 슬픔과 고통,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캐서린의 비참함은 곧 히스클리프의 비참함이었다. 하지만 사랑에는 예기치 않은 착오와 착시가 방해꾼처럼 끼어드는 걸까. 두 사람은 캐서린이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서로에 대한 진정한 마음을 나누고 확인하게 된다.
2. 하지만 그렇게 끝났더라면 더 좋았을 걸. 캐서린이 죽고 난 후 히스클리프가 보여준 모습들은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광기, 광폭함의 연속이다. 캐서린과 에드거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서린)을 자신의 며느리로 맞이하지만 음침하고 어두운 집안에 들여앉혀놓고는 밖을 떠돈다. 마치, 히스클리프의 춥고 어두웠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겪어보라는 듯.
나는 캐서린이 죽고 난 후 후반부터는 좀처럼 이 작품에 몰입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는다는 건 생각보다 따분한 일이었다. 아직도 히스클리프를 이해할 수 없다. 몇 년 후 다시 읽으면 혹시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이루어지지 못한 불과 같은 사랑만이 기억이 남았다. 하지만 몇 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캐서린이 죽고 난 후 작품 전반에 흐르는 죽음에 대한 동경과 평화였다. 넬리는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의 임종 순간을 이처럼 설명한다.
“지상이나 지옥의 무엇도 방해할 수 있는 평온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하고 끝이 없는 내세..... 죽은 자들이 들어간 영원한 시간...... 생명은 무한히 지속되고 사랑은 끝없이 서로 화답하며 기쁨도 그 충만함에 있어 한정이 없는 그런 곳에 대한 확실한 다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캐서린이 이처럼 ‘축복받은 해방’을 맞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며 슬퍼하는 애드거 린튼의 사랑도 지독한 이기심 아니냐고 덧붙인다. 영면에 든 자를 위해서는 오히려 기뻐하고 축복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범부의 사랑은 아직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애석함뿐.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무덤가를 찾아가서 그곳을 배회한다. 마치 그곳이 자신의 안식처나 되듯이. 그리고 이 소설은 히스클리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어차피 살아서 이뤄질 수 없던 캐서린과의 사랑을 저 세상에서는 이룰 수 있었던 걸까.
<폭풍의 언덕>에서는 시종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매서운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와 불과 같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에게 사랑을 준 유일한 사람은 캐서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