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희망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 클라라는 AF(Artificial Friend)다. 인공 로봇친구다. 조시의 엄마가 백화점에서 구입해서 조시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조시의 엄마는 클라라를 고를 때 매우 신중했다. 기능이나 성능 면에서 더 향상되고 업그레이드된 ‘아이’들도 많았지만 클라라를 고른 건 오로지 조시가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클라라는 조시의 집으로 온 후, 조시를 닮기 위해서 조시의 행동 하나하나를 배운다. 조시의 엄마는 조시의 언니인 큰 딸을 잃었다. 조시는 이름 모를 병을 앓고 있다. 행여 조시가 죽게 되면, 조시를 대신할 존재를 찾기 위해 엄마는 클라라를 구입한 것이다.
조시의 아빠는 자신의 아내의 이런 행동을 마뜩잖아한다. 아내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인공로봇이 자신의 딸을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특한 인공 로봇, 클라라는 자신이 조시의 마음을 배우면 조시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공 로봇을 잘 길들여서 자신의 딸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아내의 희망, 조시의 마음을 잘 배워서 조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인공 로봇 클라라의 희망, 분명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희망을 갖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빠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한다. ‘희망이라는 게 지겹게도 떨쳐 버리지질 않’는다고.
우리는 흔히 희망을 가져, 희망찬 내일, 희망이 있기를... 이런 식으로 희망을 화사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희망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희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딱히 뭐라고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희망은 꿈, 소망, 바람과는 어떻게 다른가.
누구도 희망을 간단히 말할 수 없다. 희망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마냥 좋다고만도 할 수 없고, 싫다고도 할 수 없다. 희망은 이뤄질 수 없기에 희망이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글이 생각난다.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글이었던가...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만약, 이뤄질 수 있다면 그건 ‘희망’이 아니라고.
그때 그 글을 보며 나는 속으로 반복했다. 말도 안 돼. 너무 염세적이고 시니컬하다고 생각했다. 희망에 대한 모독이야. 나는 꿈이 이뤄지듯 희망도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희망을 꿈꾸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나는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희망에 부풀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희망의 본질을 잘 보여준 말이 아닐까. 희망은 부푸는 것이다. 부푼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빠른 속도로 꺼지고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말은 어쩌면 희망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만약 그 희망과 꿈이 현실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꿈과 희망이 아니다. 대신 또 다른 꿈과 희망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마치 사람은 희망이라는 자리에 뭔가를 놓아두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늘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가니까.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희망한다. 왜냐? 그것이 인간을 살아가게 만드니까. 삶을 지탱하게 만드니까. 희망을 꿈꾸되, 희망에 속지 말아야 한다. 희망의 민낯을 봐야 한다. 그게 희망에 대한 예의인지 모른다.
내 안에 무수한 방이 있다
2. 이 책은 인공 로봇과 사람에 대한 관계를 다른 소설이다. 클라라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처음 백화점에서 상품으로 진열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요즘 아이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필요에 따라서 구체적인 사양이나 기능을 보고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을 고르듯이 소설 속 아이들도 ‘신상’ 인공 로봇친구를 고른다. 얼핏 보면 인공 로봇이 미래를 지배하는 SF 시대나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소설은 그렇다고 하기에 너무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클라라가 너무 인간적인 로봇이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입력값대로 움직이고 행동하지만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읽어낸다. 그리고 간혹 외로움도 탄다. 언젠가 사려져 버릴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에 유한성에 대한 막연함 외로움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조시와 친구가 되고, 조시 가족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낼 수 없는 방’에 비유한 대목이다.
클라라: “... 그게 가장 배우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이 아주 많은 집하고 비슷할 것 같아요. 그렇긴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 에이에프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이 방들을 전부 돌아다니면서 차례로 신중해서 연구해서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빠는 그 방은 그렇게 쉽게 파악되는 것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빠: “하지만 네가 그 방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해 봐.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또 다른 방이 있고, 방 안에 방이 있고 그 안에 또 있고 또 있고, 조시의 마음을 안다는 게 그런 식 아닐까? 아무리 오래 돌아다녀도 아직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 또 있지 않겠어?”
한 사람이 가진 방의 규모나 특성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고 사람 아니까. 그것을 몇 개의 계산식과 입력값만으로 정확히 추측할 수 있었다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소설이나 시, 음악, 미술, 철학, 심리학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내 안에 몇 개나 있는지 모르는 그 방들이 좋다. 재미있고 궁금하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읽으며 그 방을 탐험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