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철의 <가난의 문법>
가난은 우리의 디폴트 인지도
1. 타인의 가난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나. 대부분은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나 개인의 힘으로 어쩌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은 너무나 많고, 가난이라는 존재는 깊고도 깊은 수렁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전전하다, 아마도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저 지경까지 가난하게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할지 모른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타인의 가난을 보면서 내 안정된 생활을 확인한다. 그리고 위로받는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빈곤층의 처참한 삶을 보면서 여유로운 삶은 보장된 것이 아니고 오늘 성공했다고 내일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게 타당하다’고 말한다.
가난을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가난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기는 너무 힘들지만, 부유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가난해질 수 있다. 어쩌면 가난은 우리의 디폴트인지 모른다.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폐지 줍는 노인이나 쪽방촌 사람들의 삶을 그저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만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논리이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진실이기도 하다.
가난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
2. 가난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 불편한 것이다, 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예전부터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당연히 죄는 아니다. 하지만 불편한 삶이 극도에 치닫거나 한없이 이어진다면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이 아니고서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난은 또 하나의 신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난의 문법>은 한 사회학자가 폐지를 줍는 서울의 노인들을 취재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서 쓴 글이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삶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잘못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저자는 ‘윤영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했다. 못 배우고 가진 것 없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사회적인 흐름과 경제의 융성과 몰락 속에서 어떻게 가난해질 수 있고 빈곤에 처하는지를.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결국, 가난이라는 것은 이 사회가 낳은 산물이기에 국가와 공동체가 함께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가난은 극복될 수 있을까. 하지만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 뭐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어린아이와 노인의 가난, 빈곤은 절대 방치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