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의 <시와 산책>
습기를 머금은 책
1. 이런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자기계발서나 경영서 같은 실용서적이 햇살과 같은 책이라면 소설이나 시는 구름 또는 비에 속하는 장르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이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모호하고 그 모호함 때문에 자꾸 그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불명확성, 불명쾌함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쪽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비나 구름이 지배하는 풍경은 햇살이 있을 때와는 또 달라서 비의적이고 다중적이다. 분명 다른 느낌을 주는데 그 다름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아마도 물기를 머금었기 때문 아닐까. 다림질을 할 때 스팀을 넣거나 분무기로 물기를 살짝 주듯, 우리 일상에도 적당한 물기, 습도는 필요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시나 소설이다. 그래서 시는 약간 어두울 때, 기분이 눅눅할 때 읽으면 가슴에 더욱 와 닿는다. 퍽퍽하고 메마른 가슴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시의 감성을 빨아들인다.
산문같은 시, 시같은 산문
2. <시와 산책>은 시간의 흐름 출판사에서 나온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물론 시리즈를 전부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어느 책도, 앞으로 나올 책도 이 책을 대신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밤마다 아껴가며 읽었다. 페이지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고 서운했다. 여리고 순한 동물의 털을 천천히 쓰다듬듯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을 쓰다듬었다.
이 책은 산문으로 되어있지만, 산문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햇빛 화창한 날씨보다는 실비가 내리는 오후나 어둑신한 저녁에 읽는 게 어울린다. 내 마음이 기쁘거나 확신을 얻어서 반짝일 때보다는 내 자신이 초라하고 가여워서 조금은 위로해주고 싶을 때 읽고 싶다.
이러한 친구 같은 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괜찮다면, 한 편쯤은 소리를 내서 나지막이 낭독 해봐도 좋은 책. 시를 읽는 일은 내 마음의 지도를 산책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