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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Mar 22. 2021

김말순 여사의 장례식 -5-

인생이란 미친 클리셰의 연속

장의사는 장례의 순서와 단계별 비용에 대해 설명했다. 정작 비용에 대해 흔쾌히 수락하고 결정한 사람은 막내 작은아버지였다. 큰아버지네와 고모네는 집안의 맏이였으나 꿀 먹은 벙어리마냥 견하지 못하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사실상 집안에서 돈을 제일 잘 벌고 있는 사람은 막내였고 자연스럽게 장례식 주도도 막내가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란 것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항렬이고 나이고 그저 가장 많이 가진 자가 언제든 맏이고 지도자다. 사실상 이 집안의 가장 맏이는 고모인 것을. 고모는 젊었을 땐 맏이와 여자라는 이유로 형제들을 먹여 살리기 바빴고, 나이가 든 지금은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어떠한 주도권도 갖지 못했다.


고모는 미남인 할아버지를 쏙 빼닮아 동네에서 제일 예뻤다. 원래 큰 딸은 아버지를 닮는 법이다. 동네 총각들은 고모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고모는 눈이 굉장히 높았다. 동네 평범한 총각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동네의 어중이떠중이와 결혼하여 인생을 낭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고모는 서울로 올라가 꿈을 펼치고 싶었다. 더불어 이 지겨운 집안의 뒤치다꺼리도 그만두고 말이다.


그녀는 배우가 꿈이었다.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근사해 보였고, 연기는 쉬워 보였다. 그녀는 원할 때 자유자재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았고,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도도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틈만 나면 거울을 보며 열심히 연습했다. 이따금은 티비에 나오는 아름다운 배우들보다도 자신이 더 나아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살던 동네는 산골마을로 어떻게 하면 배우가 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서울에 올라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모님께 상의하진 못했다. 할아버지 머릿속에는 둘째 부인 생각뿐이고 할머니는 계집애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며 불같이 화를 내실 게 뻔했다.


동네에 멋쟁이 신사가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 신사는 항상 재킷에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린 셔츠와 바지를 차려입었다. 재킷은 어느 날엔 노란색을 입기도 했고 어느 날엔 파란색을 입기도 했다. 고모는 처음에 그 신사가 서커스 단장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이내 마을에는 그가 서울에서 어마어마한 부자로 지내다 왔다는 수군거림이 돌았다. 


고모는 길을 걷다가 신사와 몇 번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신사는 고모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고모를 보며 침을 흘리는 총각들은 워낙 많았기에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나마 이 동네에서 돈 많기로 소문이 난 그 신사의 이미지가 조금 더 좋아 보일 뿐이었다. 신사의 인상은 언제나 굉장히 서글서글했고 시원스러운 눈매가 다정해 보였다.


그 날은 유독 집안일이 많고 정신이 사나웠다. 고모는 정신없이 빨래를 하고 밥을 차려내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닭들에게 모이를 뿌리고 밭에 나가 잡초를 캐고 등등 끝없는 노동을 했다. 중간중간 큰어머니를 달달 볶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밭에서 한창 일하는 할머니를 위해 머리에 잔뜩 찬거리를 담은 쟁반을 이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나서던 고모는 그만 돌부리에 차여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애써 담아온 찬거리가 사방으로 쏟아지려는 찰나 누군가 쟁반과 고모를 넘어지지 않게 꽉 붙들어 주었다. 그 찬거리가 길에 나뒹굴었으면 단순한 잔소리로 끝날 일이 아니었으리라. 누군가의 품에 폭 안겨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나, 바로 그 멋쟁이 신사였다 라는 뻔한 드라마 클리셰의 한 장면 마냥 고모는 그렇게 그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자신을 꼭 끌어안은 아늑한 품도 넓은 어깨도 참 좋았다더라, 그런 감상평과 함께 말이다.

흔히들 운명이다 인연이다 부르짖는 뻔한 한 순간이 당사자들에게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그래, 얼굴도 그만하면 봐줄만하고. 재산도 많다고 하고. 고모가 그 신사를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날이 계기가 되어 둘은 차츰 가까워졌고, 큰어머니의 입김이 더해져 안 그래도 집에서 시집을 가라고 성화 아닌 성화를 부려대던 통에. 이왕 시집을 간다면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은 이 멋쟁이 신사에게 가는 게 맞지 않겠는가.


고모는 그에게 말했다. 사실 자신은 결혼도 결혼이지만,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근데 도저히 배우가 되는 방법을 몰라 서울로 상경하고 싶었다고 말이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오랫동안 품었던 꿈에 대해 말하는 고모에게 신사는 아무 걱정 말라며, 자신과 함께 서울로 가자고 했다. 서울로 가서 당신의 꿈을 적극 지원해 주겠노라고.


자, 이제 정말로 고모는 이 결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세상이 험난하니 이러한 상황을 의심하고, 증거를 찾고, 신사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는 여러 지루한 절차를 밟았을 테지만 예전에는 모두가 그랬듯 그렇게 서로를 믿고 결혼했으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후다닥 치러낸 혼례의 덧없음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신사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고모는 서서히 신이 많은 것을 확인하지 않아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령, 신사의 나이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고모와 18살 차이가 난다는 사실라든가.

그다지, 지나가는 말로라도 재산이 많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가난이라는 상태와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라든지.

그 부인 사이에서 가진 자식이 둘이나 있었다라지.

그리고 자신은 정실부인이 아닌 첩살이로 청춘을 낭비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동네의 어중이떠중이들을 피해서 다녔건만,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와 결혼한 상태였다.


 아니지만 당사자에게는 큰 별일로 다가올 수많은 일들이 고모로 하여금 분노하게 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부모와 형제들에게로 돌려 결국 그들을 한없이 원망하게끔 말이다.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 왔던 배우의 꿈 또한 닿을 수 없는 달 저녁 안개마냥 물거품으로 흩뿌려지고 말았고.

고모의 축복받은 첫 결혼은 곧 그녀의 오랜 한으로 남게 되었다.


-5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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