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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Mar 22. 2021

김말순 여사의 장례식 -7-

이카로스의 추락

셋째 작은아버지도 처음부터 삶이 안 풀렸던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케첩과 마요네즈가 범벅된 햄버거에서부터다. 

그 시절 흔하지 않던 햄버거 집에 날 데려가서 먹고 싶은 것을 골라보라던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큰집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의 예수를 닮아 있었다. 조금 성스럽기도 하고, 온통 온화하고 평화로운 그런 표정 말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햄버거나 피자 등을 싫어했던 한식파인 나는 귀한 햄버거를 앞에 두고 작거렸다.


형제 중 가장 서구적으로 생긴 셋째 작은아버지는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펌 해서 풀고 다녔다. 체구도 왜소서 뒷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아가씨였다. 그는 당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날 그는 어린 내 앞에 커다란 스케치북과 수채화 물감들을 들이밀었고, 약 한 시간 뒤 나는 재능 없음으로 판명 났다. 그림의 질이 문제가 아니고,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원래 그림에 미친 아이들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한 자리에 오래 앉아 끈질기게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법이라고 했다. 난 전혀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엉덩이가 한없이 가벼웠다.


엄마, 마트 냄새가 나. 라는 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코너를 돌자 정말로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마트가 나왔고 엄마는 굉장히 신기해 했다. 어떻게 알았냐는 엄마의 질문에 마트 냄새가 났잖아. 엄마는 안 나? 라고 대답한 나는 평소 느끼던 대로 줄줄 내뱉었다.

편의점에서는 하얀색 냄새가 나고, 마트에서는 초록색 냄새가 나. 항상 그랬어. 의 대답에 엄마는 내가 천재 신동인 줄 알고 영재 발굴하는 학원을 수소문했다. 러 테스트를 해본 결과 나는 전혀 천재가 아니었다. 그냥 감수성이 좀 예민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나의 감정 호소성을 특별하게 여겼다. 예술 쪽이 아닐까 싶어서 음악 쪽도 알아보고 미술 쪽도 알아보았다. 역시 전혀 아니었다. 난 그냥 후각이 좀 더 발달한 예민한 감수성의 아이일 뿐이었다.


그가 미술학원을 태권도 학원으로 바꿀 때쯤 어디서 머리가 갈색인 아가씨를 데려와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했다. 장난기 많은 그는 슬쩍 내게 어떠냐고 물었고 여전히 어렸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너무 싫어, 머리색이 노는 언니 같아 라고 대답했다. 당시 염색은 보편적인 스타일이 아니어서 후천적 보수파인 내 눈에 더 꼴보기 싫었다.

이듬해 그는 염색이나 탈색을 전혀 하지 않은 단정한 단발머리의 아가씨를 데려와 다시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조용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그녀를 나는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그가 몇십 년을 기러기 아빠로 지낼 줄 알았다면 그때 그 갈색 머리 언니를 반대하지 말 걸!

지금까지도 간간히 후회되는 어린 날의 입방정이다. 그 단정하게 생긴 아가씨는 나의 작은어머니가 되었고 십 년쯤 살다가 호주 어느 지역으로 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작은어머니는 굉장히 가녀리고 청순한 상이었다. 딸도 어머니를 닮아 공주놀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항상 내게 공주를 납치하는 괴물 역할을 해달라고 한 뒤 쓰러지는 척을 해서 날 당황시켰다. 대체 여기서 쓰러지면 내가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하지? 질질 끌고가야 하나, 아니면 왕자님처럼 키스라도 해서 깨워줘야 하나? 도 한 번쯤은 공주를 하고 싶었는데 쓰러진 공주를 괴롭히려는 괴물 역이나 주구장창 맡았다.


언젠가 아빠에게 셋째 작은아버지가 거액의 돈을 빌려가서는 갚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한걸음에 쫓아가서 오만 난리를 쳐 사이가 급속도로 어색해지긴 했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참 신기하게도 볼 거 못 볼 거 다 본 후에도 명절 때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잘 모여서 얼굴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 나라면 꼴도 보기 싫을 텐데 말이다.


셋째 작은아버지사업을 유학 쪽으로 바꾸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신의 딸과 아내도 유학처로 보냈다. 당시 자식 교육에 관심이 굉장했던 부모님도 현혹되어 나를 계속 설득했다.

가면 공부하지 않고 계속 놀아도 되고, 우리나라 수학 진도가 외국에 비해 빠른 편이라 수학에도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되고, 주말엔 승마나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온갖 감언이설에도 내가 흔들리지 않았던 건 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는 의심 덕분이었다.


그렇게 그의 사업이 줄줄 풀리는 두루마리 휴지마냥 잘 풀리면 아주 좋았을 텐데.

서서히 50평대 아파트를 처분하고 20평대로, 투룸에서 원룸으로, 고시원에 다다르기까지는 아주 쉬웠다. 어째서 사업은 일으켜 세우기까지는 고달픈데 망하는 데는 채 몇 년이 걸리지 않는가.

명절 때 그가 홀로 덩그러니 있을 때면 그 눈치에, 셋째 작은어머니는 왜 오시지 않냐는 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십수 년이 지났다.

어른들의 얼핏한 대화엔 그가 아내의 이혼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작은어머니가 아예 딸을 데리고 매 달 생활비를 받으며 호주에 눌러 산다는 정보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유쾌했다. 명절 때 온 가족이 모이면 어딘지 모르게 싸한 분위기를 항상 그가 웃음으로 풀어주곤 했다. 아빠의 형제들은 곧잘 실없는 소리를 해가며 주위 사람들을 웃기곤 했는데 셋째가 그 역할 중 가장 으뜸이었다.

하지만 그도 웃지 않고 구석에 앉아 핸드폰만 할 때는 세상의 온갖 시련을 품은 표정이었기에 감히 곁에 가까이 가진 못했다.

설날 세배를 시작하려고 아이들이 한복으로 탈의하는 둥 분주해질 때면 그는 담배를 핑계로 세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비우곤 했다. 눈치란 것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철없는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어른들의 수군거림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저 웃기거나 웃기지 않거나 여전히 딱하고 안타까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초상화 속의 예수와 닮아 있었던 그의 옛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 구불구불한 펌 머릿결 사이로 보이던 그의 평온한 온기 가득한 표정과 온화로운 분위기 말이다. 더 이상 예수가 떠오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의 세월의 흐름 또한 서글펐다.


-네, 고모 남친 있으시대요. 잘생기셨어요.

-우리 누나는 그 나이 먹고도 잘 나가네. 아주 세상 모든 남자랑 한 번씩은 결혼하겠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셋째 작은아버지와 실없고 의미 없는 대화를 핑퐁식으로 나누고 있는데 넷째 작은아버지가 우리를 급히 부르셨다.


-예배 시작한다.

어느새 교회에서 온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예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조문객들의 신발이나 정리할 겸 긴 신발정리용 집게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너도 예배에 참여해야지.

넷째 작은어머니가 내 어깨를 꼭 끌어안은 채 끌고 갔다. 기독교와 영 연이 없는 나의 태도를 그녀는 항상 불만스러워했다. 나는 유일하게 이 기독교 집안에서 무교를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이 나를 교회에 다니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나의 사상은 기독교보다는 차라리 불교에 더 가까웠으니.


-이게 무슨 예배예요?

-위로예배인데, 원래 임종예배도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급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이렇게 빈소 차린 후에 위로예배를 드린다더라.


모든 예배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나의 바이 헛된 꿈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7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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