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말순 여사의 장례식 -8-
마태복음 7장 7절
예배는 큰아버지가 주도하셨다. 그는 더이상 말을 더듬지 않는다. 찬송가가 높이 울려 퍼질 때 나는 자꾸만 할머니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영정사진에서의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웃을 일이 많지는 않았다. 모두들 입을 모아 그녀가 충분히 장수했다고 호상이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흔히들 말하는 유령의 형태를 하고 온전한 영혼의 모습으로 이 찬송가 소리를 듣고 있을까. 또는 언제 존재라도 했냐는 듯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을까.
나를 제외한 우리 집안 식구들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모두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복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맹장이 터졌다고 했다. 급히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그녀는 죽어도 당신의 배에 칼을 댈 수 없다며 버텼다. 수술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날뛰었다. 가족들은 그녀의 완강함에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녀의 고집은 누가 와도 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죽을 날 아닌 죽을 날을 받아놓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을 때였다.
동네 누군가가 예배를 추천했다. 천국이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우리 가족들에게 그는 죽더라도 천국에 가야 하니 목사님을 꼭 만나야 한다는 신박한 논리를 펼쳤다.
결국 목사님이 집에 방문했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자 맙소사 할렐루야, 그만 복통이 나아버렸다는 신통방통한 이야기와 함께 온 가족이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아빠가 내게 말했을 때 난 도저히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맹장은 변으로 나왔다나 뭐라나. 그렇게 사람의 내장기관이 함부로 배출될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거니와 기도 한 번으로 나을 수 있는 질병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 것을.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내게 아빠는 야 이 새끼야, 안 믿을 거면 믿지 마.라고 함축했다.
그리고 내가 믿든 말든 그녀는 결국 94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몸에 칼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똑똑히 지켜본 넷째 작은아버지는 형제 중 가장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스스로 실감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오.
그는 그 말을 좌우명처럼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 얻어냈다.
넷째 작은아버지는 큰아버지와 막내 작은아버지에게만 허락된 교육을 자기도 받겠다고 우기고 우겨서 겨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배움을 좋아했고 특히 그림을 즐겼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그는 곧 석사과정을 밟았고 박사과정을 밟던 도중 지도교수의 퇴임으로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되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방의 한 사립대 라인을 타다가 결국 어느 국립대의 부교수 자리를 타냈다. 그의 목표를 이루는 데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 결혼도 했다. 무엇보다도 넷째 작은어머니의 희생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녀는 신혼 때부터 할머니와 같은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분가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월세방조차 얻을 돈이 없었던 넷째네는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와 지내야 했다.
하지만 흔히들 그러듯 희생이라는 것은 한때의 고마움으로나 치부되고 끝나버리는 감정인 것을.
바쁘다는 핑계가 쌓이고 쌓여 늦은 퇴근으로 변질되고 하루, 이틀, 출장 등의 이유로 잦은 외박이 포개어지는 나날들이 이어질 무렵이었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오.
여자의 촉은 무시할 수가 없이 날카롭기 마련이다. 잦은 출장을 핑계로 거의 집에 거의 머물지 않았던 넷째 작은아버지가 웬일로 집에 얼굴을 비춘 날이었다. 몰래 훔쳐본 핸드폰 속 지정된 아내는 작은어머니가 아닌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 제자였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하면서도 결국 보고 배운 게 그러한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 모양이다. 작은어머니는 젊은 날을 모두 바쳐 그를 지원했던 자신의 억울함으로 그만 끙끙 앓아누웠다.
오히려 자리에서 들고 일어선 건 작은어머니가 아닌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둘째 부인의 집에 쳐들어가서 가마솥을 떼다 던졌던 그 시퍼런 기세 등등함 그대로 제자 집에 쳐들어갔다. 노인네의 시퍼런 서슬에 경찰을 부를 수조차 없었다. 살림의 반을 때려 부순 할머니는 자신을 말리는 넷째 작은아버지의 뺨을 모질게 후려쳤다. 내가 이런 꼴 보려고 그놈의 집구석을 안 나가고 너희를 키운 줄 아냐는 소리와 함께.
물론 형제들을 키운 대부분은 고모와 아빠였지만 어쨌거나.
넷째 작은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영 가정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딸을 둘이나 두었다.
딸이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밟는 동안 그렇게 애타게 매달렸던 교수 자리가 날아갔다. 자세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오해와 모략에 빠져 그렇게 되었더라 정도였다. 덕분에 딸은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생활을 지켜낼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아는 이야기 같은데 도통 내 귀에까진 오지 않는 자세한 정황들은 그저 상상으로만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장례식장에서 그들이 보기 불편한 건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난리부르스를 쳤던 세월이 있었음에도 저렇게 넷째 부부가 화목한 가정인 척 서로를 감싸 안고 다니는 모습이 영 마뜩잖다.
예배가 끝나고 넷째 작은어머니는 또 내게 종교를 강요할 폼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내가 공부를 못한 것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재수한 것도, 취업을 하지 못한 것도 전부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라나. 그렇다면 과연 내가 교회를 성실히 다녔으면 뭐라고 하셨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본인은 교회를 다닌 덕분에 남편이 바람이 난 것인가? 넷째 작은어머니는 따스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쥐며 넌지시 물었다.
-유미 너, 남자 친구 있니?
가슴이 갑갑함으로 가득 차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에게 들을 때마다 목 안쪽이 콱 막히는 그 느낌. 언제부턴가 저 물음엔 가식적으로 웃어넘길 수조차 없어졌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넷째 작은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교회에 다니면 좋은 남자들도 많은데.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결혼 생각도 해야지.
조근조근한 넷째 작은어머니의 음성이 고막에 날카롭게 찢겼다. 삐죽삐죽 미소로 대충 때우고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요즘 그런 질문 하면 꼰대 소리 듣는다던데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꼰대가 꼰대 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다니. 막내 작은아버지가 어울리지도 않는 허허,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우리 집안 꼰대 중의 최고 꼰대 등장이시여.
-8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