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누리 Jun 09. 2019

사람이 먼저냐, 법이 먼저냐

당연히 사람이 먼저죠?


 한달 전, 리갈던전(legal dungeon)이라는 게임을 했다. 이름은 던전(dungeon)이지만, RPG류 게임은 아니다. 경찰이 되어 절도, 살인 등 총 8개 사건에 대한 수사서류를 쓰는 게임이다. 뉴스·법정 드라마 등을 보며 '관람자'의 위치에 서있던 적은 많았지만 실제로 '참여자'가 되는 것은 처음이라 꽤나 흥미로웠다. 그런데 후기를 남긴 유저들이 하나같이 '경고'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역전재판 류의 게임은 아니니 마음 단단히 잡고 하셔야합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제 1장을 펼쳐보기까지는….


● 초짜 : 나에겐 법이 전부


여기서는 삿대질도 못 한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에피소드들


 제 1장을 풀고 나서야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우선, 생각보다 스토리가 극적이지않다. 하지만 서사는 분명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삼국지와 동양철학사 중에 후자같은 느낌이다. 때문에 활자에 거부감이 없고, 무언가 얻고자하는 사람이 적응이 빠를 듯하다. 게임을 하고 있으면, 분명 퇴근을 했는데 다시 업무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가봐도 기소당할 나쁜 놈인데도 빽으로 풀려나고, 나만 등급 깎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같은데도 우리랑 관계 없다고 주변 동료들은 나몰라라하고. 초반에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혼동이 왔다. 진정 초짜 경찰이 된 것이다.


● 중짜 : 법에겐 내가 전부 


나의 인사고과서같은 스토리라인


 그래도 플레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법 빠르게 수사를 진행해나갔다. 상사의 눈치도 볼 줄 알고, 사건의 흐름까지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일이 잘 되어 부하가 신이 나면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이제는 '사건의 진상을 어떻게 찾을까?'가 아니라, '사건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볼까?'라는 관점으로 게임을 했다. 내가 어떤 단서를 제시하고, 어떤 논리로 풀어나가느냐에 따라서 나는 솔로몬이 될 수도 있고, 히틀러가 될 수도 있었다. 법은 그 자체로 완전한 절대 기준이 아니었다. 나는 게임을 끄고나서 오프라인에서도 주변인에게 뭔가 아는 양 허세에 가득한 논리를 펼치곤 했다. 


● 고수 : 나는 뭐고, 법은 또 뭐고?


무섭다.
튜토리얼 NPC마저도 나를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후반이 되어갈수록 진행되는 스토리에 나는 혼란을 느꼈다. 내 선에서 종결지었다 생각한 사건은 갑자기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뒷통수를 때리고, 잘 마무리했다싶었던 사건은 되려 내 목을 옥죄어 경찰 인생을 끝나게 했다. 내가 잘 길들였다 생각한 사냥견이 나를 문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얘가 날 놀아준거구나.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많은 이야기들은 할 수 없지만, 난 다시 현실세계에서 입을 다물었다.


 엔딩까지 도달한 적이 별로 없던 나는 그래도 이 게임은 끝을 보았다. 그렇게 긴 플레이 시간을 요하지는 않기 때문에 누구나 금방 도달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그 짧은 플레이 시간만으로도 기존에 갖고 있던 법에 대한 개념이 뒤흔들렸다. 이 게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일날 친구가 선물을 주었는데 포장리본을 거미줄 모양으로 이리저리 꼬아서 준 느낌이다. 풀어볼테면 풀어봐라! 하는 느낌인데,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눈이 충혈될 때까지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이다. 이 기분은 스팀에서 단돈 7,500원에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이 먼저냐, 법이 먼저냐. 이 게임을 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사람이 먼저지'라고 생각했을 나였다. 하지만 엔딩을 보고 나니, 그것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고독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