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 깨물어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깨물지 않게 되잖아
같이 일하는 선생님에게 김을 선물 받았다. 고소한 참기름과 짭조름한 소금으로 간이 된 김이 아니라 새까맣고 빳빳한 생김이었다. 밥맛 없을 때 살짝 구워서 간장에 콕 찍어 먹으라는 다정한 말이 덧붙은 선물이었다. 뜻밖의 선물에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렸을 땐 물릴 정도로 먹던 김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김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집이나 아침 시간은 전쟁이었다. 아빠의 출근, 나와 남동생의 등교.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빠의 차를 얻어 타지 못하면 20분을 걸어 학교에 가야 했다. 그리고 꾸물거리다간 아빠의 옆자리에 앉을 기회를 남동생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바쁘게 움직이며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나와 내 동생 입으로 불쑥 김에 싼 밥이 디밀어진다. 이거만 먹고 가, 한 번만 더 먹고 가. 자잘한 반찬이 콕 박힌 김밥은 내 입에 한 번, 동생 입에 한 번 번갈아 가며 들어왔다. 반쯤 감긴 눈으로 양말을 신으며 오물오물 엄마의 손길이 담긴 밥을 받아먹었다.
희한하게도 같은 김, 같은 밥, 같은 반찬으로 김밥을 만들어 먹어도 엄마가 만들어 준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아침에 먹은 기억을 더듬어 저녁에 내 손으로 김에 밥을 싸서 입에 넣어도 그 맛이 나지 않았다. 플라스틱 통에 가지런히 잘려 넣어진 김을 신중하게 한 장만 쏘옥 꺼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잘못했다간 두세 장이 한꺼번에 따라 나와 귀찮게 하곤 했으니. 아침처럼 밥 한 번만 싸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별걸 다 해달라며 대충 김밥을 만들어 꾹꾹 눌러 입에 넣어줬다. 엄마의 온기가 묻은 막김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김의 서너장 남을 때쯤, 엄마는 김을 구웠다. 가스레인지 불을 제일 약하게 켜고 그 위로 생김을 능숙하게 이리저리 뒤집었다. 김을 구우면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가끔 마른 김이 물릴 때면 엄마는 구운 김 양면에 참기름을 붓으로 쓱쓱 발라 맛소금을 솔솔 뿌리기도 했다. 파는 걸 사와도 투정 부릴 사람 하나 없었지만, 엄마는 매번 그렇게 김을 구웠다. 종이로 묶인 생김을 몰래 뜯어 입에 먹어보기도 하고, 막 구운 김 한 장을 얻어 입에 와앙 넣기도 했다. 먹기 편하게, 먹음직스럽게 포장된 김보다는 엄마의 정성이 담긴 김이 좋았다.
받은 김을 들고 주방에 서서 한참 고민했다. 보고 배운 바에 의하면 가스레인지의 약한 불이 있어야 하는데 집에는 인덕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김을 선물로 주신 선생님께 물어보니, 프라이팬을 달궈서 그 위에 굽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찬장에서 프라이팬을 꺼내는 와중에도 괜히 아쉬웠다. 엄마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인덕션의 버튼을 돌려 프라이팬을 올렸다. 금세 팬 위로 열이 올랐다. 김을 한 장 꺼내 그 위로 조심스레 올리니 새까맣던 김에 초록빛이 돌았다. 이내 알고 있는 구수한 냄새가 났다. 검초록빛으로 김이 맛깔스럽게 구워졌다. 어렸을 적 집에 은은하게 풍기던 김 굽는 냄새가 떠올랐다. 넓은 쟁반에 구운 김을 한 장 두 장 겹쳐 올려 가위로 잘라 플라스틱 통에 가지런히 집어넣었다.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김이 든 통은 항상 식탁 한구석에 놓이곤 했다. 김이 가득 담긴 통의 뚜껑을 닫아 싱크대 한쪽에 두니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김을 찍어 먹을 간장도 만들었다. 간장 조금, 외할머니에게서 받아온 참기름 쪼록, 고춧가루, 깨를 톡톡 털어 넣었다. 엄마가 뭘 더 넣었던가, 아니면 안 넣었던 게 있나. 새끼손가락으로 콕 찍어 먹어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간장 말고는 외할머니의 작품이니 엄마가 만든 거랑 큰 차이가 없었다. 엄마도 외할머니의 애정이 담긴 재료를 썼으니. 밥을 새로 해서 그릇에 가득 퍼 담았다. 구운 김을 한 장 왼손에 들고 따끈한 밥을 얹었다. 그리고 만든 간장 위로 쿡 찍어 얼른 입에 넣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만들어 준 그 김밥이 떠올랐다. 고소한 김과 짭짤한 간장, 달콤한 흰 쌀밥. 어렸을 적, 바쁜 아침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 그때는 엄마도 나를 사랑했을 거다. 함께 산 20여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겠지. 바싹하게 구운 김에 밥을 싸서 딸의 입에 넣어주던 엄마도 여느 엄마처럼 딸을 사랑했을 거다. 세월에 희석되어 사라진 엄마를 향한 감정과 침전되어 더는 떠오르지 않는 딸을 향한 애정. 김 한 장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목구멍이 콱 막혀 입안에 든 밥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사랑받으며 크고 있다 믿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얼른 플라스틱 통의 김을 해치워야겠다. 다 먹어 없애고 나면 추억에 젖어 먹먹해진 이 순간 또한 다른 추억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