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서
관성 : 물체가 외부에서 그것의 운동 상태, 즉 운동의 방향이나 속력에 변화를 주려고 하는 작용에 대해 저항하려고 하는 물체의 속성을 말하며, 이 속성은 물체가 갖고 있는 질량의 크기로 정량화될 수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움직이려는 건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멈춰있는 물체는 계속 멈춰있으려는 성질이다. 맑은 날에 이불을 내다 널고 팡팡 쳐서 먼지를 날려 보내거나, 자동차를 타고 커브길을 돌 때 몸이 쏠리거나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짜릿한 몸의 감각 따위는 관성 때문에 우리가 겪는 현상이다. 중학교 과학 시험에 단골로 문제가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다음 중 관성의 법칙으로 인해 생기는 일이 아닌 것은? 다섯 개의 보기 중에서 답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그라미 안에 들어있던 다섯 개의 숫자 아래에 여섯 번째 선택지를 집어넣어본다. ‘사랑’이라고. 사랑 또한 관성이다. 한 번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다가가고, 감정이 식으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확 가라앉곤 하니까. ‘사랑의 콩깍지’라는 말을 과학적으로 다시 표현하면 <사랑은 관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감정은 습관이고 그 습관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 쉽게 바뀌지 못한다. 마음이 멈추면 다시 움직이기 힘들고, 내달리는 마음은 멈춰 서기 힘들다.
관성은 물체가 갖고 있는 질량의 크기고 정량화된다. 질량이 큰 물체일수록 그것이 가지고 있는 운동의 성질을 바꾸기 힘들다. 차가 갑자기 멈출 때, 가벼운 사람의 몸이 앞으로 더 확 고꾸라지는 이유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 감정을 덜어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토니오가 한스 한젠을 사랑하고 있었고 한스로 인해 벌써 많은 고통을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난 그의 영혼은 이미 삶으로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토니오 크뢰거, 11쪽>
<토니오 크뢰거>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곧 패배자라는 말이 나온다.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애정의 양과 패배감은 정비례한다. 더 많이 좋아할수록 돌아오는 상처는 크다. 사랑했던 감정을 다 비워냈다고 생각했는데도 깊은 곳 어디에선가 그 감정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건, 밑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미련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잠겨 멈춰 있었기에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묵은 감정은 뜬금없이 가슴을 쿡쿡 찔러온다. 언제쯤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약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삼킬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고 정해진 기한이 넘어가면 아무리 목구멍으로 넘겨도 효과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다시 떠오르지 않게 꾹 눌러 담아 숨기는 수밖에.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끝났다. 좋아하기 전에 내가 상처 받을 것을 가늠해보고 그 상처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인지 고민한 후에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보통은 저울질하다가 시작의 타이밍을 놓치곤 한다. 어렸을 때의 사랑이 가장 순수하다는 말. 그래, 그게 맞다. 아파본 적 없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 패를 다 보여주고 처참하게 게임에서 지더라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 맹목적인 사랑은 이제 하지 못한다.
지금 내 사랑은 멈춰있다. 적절한 방향과 속도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잡고 매달릴 게 없다.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너무나도 순간이다. 누군가 내 등을 밀어준다면 다시 사랑을 향해 내달릴 수 있을까. 패배자의 삶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