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열심히” 살라고 말했나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가는데

by 눈꽃




잠이 오지 않아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과거로 향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대부분 남은 흔적은 행복하고 즐거울 때이다. 불행한 순간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카메라를 켜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우울은 수용성이라 물에 씻겨 나가고 슬픔은 휘발성이 강해 시간이 흐르면 날아가버린다. 그에 반해 행복은 묵직한 돌멩이 같아 심연에 가라앉은 채 오래도록 남는다. <인사이드 아웃>처럼 노란 구슬이 되어 기억 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가르쳤던 아이들과의 기억이 사진첩에 꽤 남아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수업 중에 즐거운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하고. 분명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괴롭고 힘들었는데 남은 추억은 웃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벚꽃놀이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고, 몰래 간식을 먹고 시험기간에 고생하며 공부하던, 그리고 성적이나 친구 문제 때문에 엉엉 울기도 하고 혼이 나서 시무룩해지기도 하던 아이들. 가끔은 나의 우울을 만지작거리며 괜찮냐 물어주던 따뜻한 아이들. 애초에 나는 아이들을 미워하지 못한다. 그게 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죽어가는 나를 돌보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온 신경을 쏟았다. 올해 애들만, 다음 해 애들만 대학 보내면 하며 퇴사를 미루고 또 미뤘다. 눈앞의 아이들이 나에게 도와달라 손을 내미는데 어떻게 뿌리치고 혼자 도망갈 수 있겠나.


나를 갉아먹어가며 버텼다. 애들도 애들이었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일을 쉽게 그만두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 하나에 매달려 목에서 피가 넘어오고 한 달 동안 기침을 달고 호흡기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하며 ‘살았다.’ 그게 과연 사는 게 맞았을까? 새벽 4시에 택시를 잡아 타 귀가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몇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출근했다. 게으르면 안 된다, 부지런해야지, 노력해야 한다, 젊었을 때 고생해야지.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이런 끔찍한 문장을 입에 처음으로 담은 사람은 누굴까. 왜 사람은 열심히 살고 열심히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 결국 도착지는 다 같은데.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걷거나 달리는 속도만 다르고 다들 한 곳에서 만나지 않나. 그런데 왜 죽어가는 길에 에너지를 쏟아가며 열심이어야 하나.


10시간 동안 밥도 못 먹고 꽉 채워 일을 한 후, 막차를 겨우 잡아 타고 집에 들어가는 길.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길가에서 오열했다. 씽씽 달리는 차에 몸을 내던지도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홍빛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걸을 힘도 남아있지 않아 다리가 후들거렸었다-엉엉 울었다. 매일 걷은 그 길이 왜 그토록 길게 느껴지던지. 그 당시의 나는 내 개인의 삶도, 가르치는 아이들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직장 내 동료들과의 관계까지 최악이었어서 나는 마음을 털어놓을 곳 하나 없었다. 파도는 사방에서 몰아치는데 내가 서 있는 작은 섬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나는 퇴사하겠다고 원장에게 말했다.


대충 살아도 사는 거라는 걸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애써 달려서 결승점에 도달해도 쓰러지면 무슨 의미겠는가. 쓰러지기 직전에야 나는 나를 살리는 방법을 찾아 뒤를 돌았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돼. 힘들면 멈춰서 쉬고 다시 할 마음이 생기면 그때 하면 되는 거지, 뭐. 대학 가면 뭔가 엄청난 게 바뀌고 못 가면 끝나는 인생도 아니거든. 경험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슨 선택을 하든 거기에 맞추면 돼.”



애들은 열심히 해서 뭐하냐는 말에 의아해했다. 선생님이 해주는 말 치고는 너무 어른스럽지 않아서였을까. 삶에 적절한 속도를 찾기까지 고생했던 날이 눈부신 기억으로 포장되어 사진첩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안쓰럽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다 말하는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지.


3개월 동안 쉰 후, 다시 이력서를 썼다. 그리고 모든 이력서 마지막 줄에는 <시험기간 등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주 5일(월~금) 출근 원함>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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