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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슥슥 May 24. 2024

자취방 욕실은

노천탕


일 년 전이었다. 취업이 결정되면서 갑작스럽게 서울에 방을 얻어야 했다. 타지 생활은 처음이었기에 서울 부동산 정보를 부랴부랴 찾기 시작했다.


‘2호선 라인 강남역에서 멀어질수록 집 값은 싸지는구나. 근데 다들 대림역 보다 더 벗어나진 말라고 하네. 그래. 신림역이 적당하겠구나.’


유튜브 영상을 며칠간 보다 해당 특정 유튜브 채널 주인이 운영하는 부동산을 찾아갔다. 3군데쯤 소개해준 집을 둘러보니 한숨이 절로 났다.


‘이런 곳에서 내 인생 첫 자취를 해야 한단 말인가?! 진짜 싫다.’


결혼 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군대 빼고는 부모님과 따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자취 경험의 부재는 나름의 콤플렉스였고, 자취는 하나의 로망이 되었다. 하지만 부동산 투어(?)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자취가 말 그대로 허구였음을 직시하게 만들어줬다.


3군데의 집을 둘러보고 ‘이제 결정하실 시간입니다. 시골 아저씨.’라는 눈빛을 보내는 중개사에게 내 선택을 전달했더.


‘비싼 값을 주더라도 [내가 원하는 집]에 살자.’


비싸더라도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가치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1년 이상 거주한 지금도 사실 후회하진 않는다. 세이노 아저씨가 이 글을 본다면 혀를 차겠지만, 월세방 내 집을 좋아한다.


1.5룸이라 불리는 자취방의 먼지를 일주일에 몇 번은 닦는다. 인센스에 불을 붙이고, 디퓨저에 스틱을 주기적으로 갈아 꼽으며 행여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반기는 것이 홀아비 냄새가 아니길 바란다. 다행히 어제저녁에도 퇴근하고 들어간 집에서는 은은하고 기분 나쁘지 않은 냄새(?)가 났다.


네이버 지도에는 내 자취방을 별(⭐️) 표시하고 이름도 붙여 두었다. ‘세컨 하우스’라고. 내 명의는 아니지만 마치 집이 두 채가 된 것 같아 흐뭇하다.


자취방을 고를 때 염두에 둔 것 중 하나는 화장실에 창문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대학원 시절 후배들의 자취방에 가끔 놀러 가면 느끼는 기분 나쁜 꿉꿉함은 대부분 화장실에서의 경험이었다. 그들의 화장실은 대부분 창이 없었다.


자취방을 처음 고르며 가졌던 기준치고 꽤나 괜찮은 것이었다.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욕실 겸 화장실에는 창문이 없다. 지난겨울 내가 종종 즐기던 휴식은 화장실 창문을 열어 놓고 최대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떠오른다. 창문 너머로는 눈이 내리고 있고, 샤워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따뜻한 물줄기는 몸을 데워준다. 물줄기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서늘함이 느껴지지만, 닿는 곳에서는 피로가 씻겨져 나간다. 불현듯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노천탕이네. 따로 찾아갈 필요가 없네. 공짜 노천탕이 여기 있었네!‘


유레카를 외칠정도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5월 하순이 되어버린 지금도 나는 샤워를 할 때마다 감동을 느낀다. 하루를 편히 마무리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있음에.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그리 비싸지 않은 러그에 앉아 그리 비싸지 않은 약간은 붉은 스탠드 조명을 켜고 나면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 된다. 내가 쉬고, 내가 편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퇴근길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무도 없는 집안에 들어갈 때마다 “갔다 왔어.“라고 허공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내 공간이 주는 소중함에 대한 표현이자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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