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삐딱한' 공무원이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기를

by 왜살지

저는 가방에 수면제와 담배, 콘돔을 넣고 다녀요. 아, 철학이나 소설책도요. 어쨌든 공무원의 가방 목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내역들이죠. 왜 이런 것들을 넣고 다니냐고요? 수면제는 먹고 죽으려고, 담배는 열받으면 시작하려고, 콘돔은 ......

그래도 안심하셔요.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 문제 없었다구요. 실장도 못 참을 정도로 거슬리게 하지는 않아요. 심지어 전임자에게 칭찬까지 받았어요. 물론 아직 미숙한 점 투성이지만.

저도 제가 이토록 온순하게 잘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요. 저는 어딜 가나 '삐딱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철학은 제게 삐딱하게 살라고 가르쳤어요. 니체는 도덕은 인간을 길들인다고, 푸코는 규율이 권력이 만든 족쇄라고, 러셀은 소비를 찬양하고 생산을 죄악시하라고 말했었어요. (생각해보면 플라톤부터 현상을 버리고 가지계를 보라고 했었죠.)

그런데 어떻게 참고 다니고 있냐고요? 저도 제 주제를 알기 때문이에요. 저는 니체가 말한 초인도 아니고 어린아이도 아니에요. 노조에 가입하여 시위에 나가지도 않아요. (바틀비나 날개의 주인공처럼 부작위의 반항도 할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의욕적이지도 못하고, 그만큼 순수하지도 못하니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그냥 다녀요. 대신 일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해요. 저는 교육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요. 그냥 그렇게 살려고요.

가방의 목록들은 그저 환기구일 뿐이에요. 그것들은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에요. 저는 언제든 '내가 아닐 수 있어야' 숨쉴 수 있어요. 저는 더 이상 자의식의 무게를 떠받칠 힘이 없나봐요.

(기계는 자기가 기계인지 몰라야 기계일 수 있다. 나는 더 완벽한 기계가 되고자 죽음을 들고 다닌다.) (또 나는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길 바란다. 그는 '어느 누구'여도 상관없다. 이는 내가 문학을 읽는 이유와 일치하며, 철학에서 머뭇거리는 이유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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