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오픈런

by 왜살지

정신과 오픈런을 뛰었다. 개원 30분 전에 갔는데 줄을 섰다. 인간 정신의 고장률은 정신과에 들릴 때마다 경이롭다. 의사가 어땠냐고 묻길래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 입속에 맴도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별일 없었다고 둘러댔다. 의사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약을 줄여주진 않았다. 어차피 우울증 약은 안 먹을 예정이었다.

집에 오니 애인이 보고 싶었다. 애인은 오늘 약속이 있다고 했었다. 나는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애인의 잔향을 찾았다.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를 조금 읽었다. 기구한 운명을 지닌 한 가문의 파국을 그리고 있었다. 성장기 정신의 맹아를 표현한 듯도 했고 의식에 침투하는 죽음을 표현한 듯도 했다. 그리 흥미롭진 않았다.

무턱대고 우울하기만 한 소설을 읽다 보니 갑자기 몸을 움직이고 싶어졌다. 잠옷에 겉옷만 걸치고 밖에 나갔다. 하늘은 맑고 연했다. 제법 햇살이 따수웠다. 날씨는 잿빛의 시든 관목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공사 현장과 도로의 소음과도. 나는 충동적으로 편의점에서 소주를 샀다. 겉옷 안에 숨긴 다음 집 안에 들여왔다. 책상 위에는 낮에 읽던 책 한 권과 소주가 놓였다. 소주는 활자들을 썩은 녹색으로 물들였고 나는 그 안에서 열심히 의미들을 더듬었다.

날이 저물자 잠이 왔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진정제와 수면제와 16.9도의 알코올이 섞인 피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나는 겉옷 모자를 눌러쓰고 자주 가던 벤치에 누웠다. 추위는 코끝으로만 느껴졌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얼굴에 생채기가 났다. 한쪽 귀에선 아이가 울며 떼쓰는 소리가 들렸다. 귀마개로 귀를 막자 아이가 헐떡이는 리듬이 도시의 소음 위로 퍼졌다. 라벨이나 글라스의 피아노 곡을 연상시켰다. 나는 담배를 안 가져온 것을 후회하며 입으로 내뿜은 김이 얼굴 위로 내려앉는 모양을 관찰했다. 수증기의 구 안마다 다른 이의 얼굴들이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안 마주 보는 거울 속 169번째 내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답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169번째를 뺀 나머지 나들이 같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쓴 글이 전부 혹은 일부 거짓이라는 사실이 약과 함께 먹은 술만큼이나 속을 메스껍게 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진실이라는 사실에 나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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