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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 혜은 Feb 05. 2022

전세는 공짜, 집 사면 바보!

내가 알아보지 못한 기회들

 그동안 나는 집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집은 거주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기에 자신이 들어와 살지도 못하는 집을 사서 '공짜'로 세를 주는 집주인을 '바보'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산을 상속받았던 2009년, 결혼했던 2010년은 집 사는데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줄어든 매수 심리를 살리고자 일시적으로 규제 완화 정책도 많이 나왔다. 양도세 한시 감면 혜택, 양도세율 하향조정, 미분양 주택 취등록세 감면 등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지 않았다. 물론 이들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집을 산 사람들은 손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읽어냈거나, 얻어걸렸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집 사기 두려워 멈춰 있을 때, 그들은 공포를 이기고 집을 샀다. 그 결과 전세가 상승과(투자금 회수) 매가 상승(수익 발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우리 신혼집은 전세가 9,000만 원 매매가 1억 9,000만 원이었다. 1,000만 원 차이로 집주인과 세입자가 갈린다. 이 계산을 진작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1억 원이면 집을 사서 세를 놓을 수 있는데, 우리는 2년마다 5,000만 원씩 전세금을 올려주면서도 그런 계산을 못했다. 그대로 전세가 상승이 지속된다면 집주인은 투자한 지 2년 만에 투자금을 전부 회수할 수 있었으니 엄청난 복리의 마법이 아닐 수 없다.

 집은 절대로 사면 안 되는 대상으로만 봤던 시각이 문제였고, 내가 가진 돈의 가치에 대해 무관심했던 탓에 이런 계산을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집을 몇 채나 사고도 남을 돈을 은행에 넣어두고도 세 번의 전세살이를 전전했다.


그럼, 그때 내가 살았던
전셋집의 집주인들은 어땠을까?

 


 리모델링 재가 있는 신분당선 라인에 위치한 18 전셋집을 소유했던  번째 집주인, 재건축 가능성이 충분한 목동아파트를 소유하고  자신은 대전에 거주 중이던  번째 집주인. 목동, 판교, 강남  서울 요지에 집을 다섯 채나 가지고 있던  번째 집주인까지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지금 집을 사도 좋을 이유' 대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관심만 있었더라면 나는  명의 집주인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있었다. 다만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







첫 번째 전셋집

-우리 딸이 여기 산다고 꼭 말해주세요


 첫 번째 전셋집의 주인은 내 또래 젊은 여자였다. 하지만 집에 대한 모든 행정업무는 그녀의 어머니가 도맡아 했다.

"가끔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거주자 확인을 나올 거예요. 그때 우리 딸이 여기 살고 있냐고 물으면 꼭 그렇다고 대답해줘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 집주인은 위장전입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건 불법이다. 정당하지 않은 일을 시키는 집주인에게 우리는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부탁을 하면서도 그녀는 당당했다. 그런 태도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요구가 세입자의 당연한 의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말속에는 이런 힌트가 숨어있었다.

'우리 딸은 이 집에 들어와 살지 않을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세를 놓을 거예요.' 그녀가 살지도 못하는 집을 매수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집값이 상승하기를 기다리거나 전세 가격이 상승해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아파트 곳곳에 '리모델링 사업 추진'에 관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것 또한 집값이 올라갈 좋은 시그널이었다.




 '이 집을 사도 좋을 이유'를 말해주는 많은 단서가 눈앞에 있었지만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기회와 행운이 도처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당시 나처럼.


 우리는 친절한 세입자로 그 집에서 2년을 살았다. 2년 뒤 집주인은 전세 보증금을 5,000만 원 올려 받았다. 전세가가 오르는 덕에 더디긴 했지만 매매가도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금액을 주고 그 집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고, 재계약 한 달만에 계약을 파기하고 목동으로 이사를 했다.

 18평 아파트 전세는 하루아침에 나갔다. 우리 다음에 들어온 세입자는 부부에 아이까지 한 명 있었다. 2인 가구가 최대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 집의 수요층은 생각보다 두터웠다.

 이 아파트는 2021년 2월 분당 최초로 리모델링 사업 계획 승인을 받았다. 2010년 1억 9,000만 원이던 18평 아파트가 지금은 9억 원이 넘는다. 리모델링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가치는 더 올라갈 것이다.



그때 그 집을 10채만 샀어도
100억 부자가 되었을 텐데...

 당시 돈도 있었고, 투자의 기회도 있었지만 모두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과장 조금 섞어 남편에게 토로하곤 한다. 그러면 남편은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100번이다." 라며 핀잔을 준다.

  그때 딸 대신 집을 관리해주던 집주인의 행동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오늘도 하나 마나 한 상상을 101번째 해 본다.


                                                                                                    




두 번째 전셋집

- 집주인은 대전에 살아요


"아휴, 수고했어요. 이 거지 같은 집에서."

첫 번째 전셋집을 나올 때 집주인은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뭐야, 이렇게 무례한 말을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얄미웠던 집주인과도 안녕이었다.


 우리는 목동에 두 번째 전셋집을 구했다. 이번에는 집을 조금 넓혀 방 두 개짜리 20평짜리 아파트를 계약했다. 고작 두 평 넓어졌을 뿐인데 방과 거실이 꽤 크게 느껴졌다. 남향에 확장된 거실은 넓고 환한 느낌을 주었다. 드디어 사람이 살 만한 최소 공간을 찾은 듯했다.

'이 정도면 꽤 오래 버틸 수 있겠는 걸.'

내심 흡족했다.


"집주인은 대전에 살아요. 입주할 계획은 없어요."

 나는 무엇보다도 부동산 중개인의 이 말이 좋았다. 이사를 한번 해보니 생각보다 깨지는 비용이 많았다. 최대한 오래 살 수 있는 전셋집을 구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기에 집주인이 지방에 산다는 말이 반가웠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날이 추워지자 이 집의 가장 큰 문제점이 드러났다. 두 번째 전셋집은 해가 떨어지면 '시베리아'로 변했다.


내게는 두 번째 전셋집이 시베리아 보다도 더 추웠다


 밤만 되면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이 집에서 겨울을 버틸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바람의 출처는 확장된 거실에 놓여 있는 붙박이장이었다. 장과 벽 사이에서 찬바람이 들어왔는데, 현관문을 여닫을 때마다 수납장이 바람 소리를 내며 들썩거렸다. 벽장 주위에 바람막이도 붙여보고 비닐도 대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견디다 못해 수납장을 뜯어보니 얇디얇은 합판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대로 옆집 베란다였다. 그 집에 뭐가 있는지 다 보일 정도였으니 붙박이장을 흔들어 대던 바람의 정체가 이상할 리 없었다.

 거실에 누우면 바닥은 펄펄 끓어도 코끝은 늘 시렸다.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다. 추위를 잘 타는 우리 부부에게 이 집에서 보내는 겨울은 너무나 길고 길었다. 어쩌면 이 해의 추운 겨울이 우리를 더 이상 세입자로 머물지 않게 도와줬는지 모른다. 그해 최악의 겨울을 버티며, 우리 부부는 내 집을 사기로 결심했으니까.








세 번째 전셋집

-우린 아파트가 다섯 채예요.


 세 번째 전셋집은 우리가 세입자로 살았던 마지막 집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사기 위해 전세 만기도 끝나지 않은 집을 산 덕(?)에 우리는 졸지에 집을 갖고도 내 집에 바로 입주를 할 수가 없었다. (그땐 몰랐지만 우리가 첫 집을 산 형식을 '갭 투자'라고 불리더라)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전셋집을 구해야 했다.


 딱 10개월만 살자는 심정으로 날짜와 조건이 맞는 집을 찾다 보니 전세가 귀한 상황에서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살게 된 세 번째 전셋집의 상태는 매우 심란했다. 1988년에 지어진 데다 인테리어도 8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입주 초기부터 줄곧 이 아파트에 살았다던 집주인의 사연은 이러하다.


 집주인은 미혼의 둘째 딸로,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역시 미혼인 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져 공기 좋은 제주로 요양 차 내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 좋게 생긴 두 딸은 학교 선생님과 공무원이었다. 그중 한 명이 휴직을 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가는 듯했다.

 그들은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어 머지않아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희망하고 있었고, 세입자인 우리는 계약기간 2년 만기를 채우지 않고도 나갈 수 있는 집을 구하고 있었다. 마침 둘의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날짜만 생각했지 집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 집은 누렇게 바랜 종이벽지에 어릴 적 기억에만 존재하는 바둑판 모양의 종이 장판이 깔려 있었다. 그동안 숱하게 집을 보러 다녔어도, 종이 장판을 깐 집은 처음 만났다. 거실 한쪽만 비닐장판이었는데 이마저도 들뜨고 찢겨 군데군데 테이프 칠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벽 곳곳에는 나무에 대못을 박은 옷걸이들이 결려 있었고, 베란다 한쪽 구석에는 홍두깨와 다듬이질할 때 쓰는 커다란 돌도 놓여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세번 째 전세집에서 만난 다듬이 돌

 

까칠하고 깔끔한 내 성격에 보고는 못 넘겼을 것들이었지만, 10개월 뒤에 이사 갈 내 집이 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눈감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 집에서 사는 10개월 동안 평생 봤던 것보다 많은 수의 바퀴벌레와 마주쳐야했다. 해충 방지 업체인 세스코를 불러도, 연기를 피워 바퀴를 잡는다는 훈증요법도 동원했지만, 그 후로도 바퀴는 유유히 집 안을 활개치고 다니다 나와 마주치면 천장의 몰딩 속으로 쏙 숨어버리곤 했다.

 그래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 역시 10개월 후에는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집을 취향대로 꾸밀 자유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전셋집의 집주인은 우리에게 세 준집 말고도 집을 네 채나 더 갖고 있었다. 판교, 목동, 강남 등지에 총 다섯 채를 보유했다. 그녀가 가진 집 중에 입지가 떨어진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마 우리에게 세주었던 자신이 살고 있었던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 가장 낡고 좁은 집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집을 다섯 채나 갖게 되셨어요?


 이제 겨우 집 한 채 산 경험이 전부였던 나로서는 그녀의 행동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는 관리만 하고, 명의는 동생이랑 언니, 오빠가 갖고 있어요."

 나는 이 말의 속뜻을 알지 못했다. 첫 번째 전셋집에서도 명의는 딸이 갖고 관리는 엄마가 해주고 있었다. 눈앞에 여러 채의 집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 힌트를 주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단해요. 서울 요지마다 좋은 집을 갖고 계시네요. 비결이 뭐예요?"

 나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집 다섯 채를 소유하게 된 비결을 물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용돈을 받으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금을 조금씩 샀어요. 우리 사 남매 모두가 그랬어요. 이 집은 제게 무척 소중해요. 아빠가 예전에 사업을 크게 하셨어요. 그런데 사업이 망하고 가족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다가 목동의 이 집을 분양받게 된 거예요. 이 집에서 식구들이 다시 뭉쳤고 재기하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때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모아 두었던 금으로 집을 사기 시작한 거예요."

  그녀의 이야기 듣고 나서야. 이 집이 골동품으로 가득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게 집은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 이상의 것이었다. 가족의 꿈을 키우는 곳, 흩어졌던 가족을 모이게 하는 것, 이것이 그녀에게는 '내 집'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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