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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 혜은 Dec 08. 2019

가을 공원에서

맨발 걷기의 묘미

 일요일 오후, 우리 가족은 집 앞 공원에 들렀다. 이 날은 춘천에서 올라오신 아버님과 함께였다. 아이 둘은 할아버지 손을 사이좋게 나누어 잡고 저만치 달려 나간다. 한 걸음 뒤처진 우리 부부는 천천히 따라 걷는다. 말없이 걷다가 슬쩍 남편의 손을 잡아 본다. 이제는 결코 먼저 손을 잡는 법이 없는 이 사람, 잡고 싶은 사람이 먼저 잡으면 되는 거다. 흔들흔들 남편과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가을이 제법 가까이 왔다. 축축한 땅 냄새, 노란 잔디 냄새, 가을의 냄새가 코 끝에서 퍼진다. 나는 계절의 냄새를 안다. 스치듯 지나가는 또 하나의 계절을 느낄 수 있었다. 탄천 둘레에 억새가 한창이었다. 나는 딸을보며 억새를 가리켰다. “저게 억새라는 풀이야.” 왠지 억새를 눈에 담아야 가을을 진짜 느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지나치려는 딸의 발걸음을 잡아끈다.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뛰어넘으며 딸이 내게 묻는다.  “엄마 오늘은 은찬이가 제대로 잘 건널까?” 지난봄 동생이 다리를 건너려다 발이 빠져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이젠 은찬이도 많이 자라서 징검다리 잘 건널걸.”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작 막내가 다리를 잘 건너는지 뒤돌아 확인해 보지 않았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제는 아이가 물속에 발을 빠트리지 않을 만큼 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꽉, 꽉’ 거위 한 마리가 사람들 틈에 섞여 활보를 하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거위 곁에서 모이를 뿌려 주고 계셨다. 거위에게 줄 것이 없는 빈 손인 아이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엄마 우리 지압하러 가자.” 딸아이는 지압로를 향해 뛰어갔다. 사실 우리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거위를 뒤로 하고 아이가 이끄는 지압로로 발길을 돌렸다.


 올여름 딱 한번 이 곳에서 맨발로 딸과 함께 걸었었다. 그날 이후 공원에 올 적마다 딸아이는 지압로 타령을 했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지압로에 가자는 제안이 반갑지 않았다. 맨 발이 돌에 닿는 느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움추러들었다. ‘절대로 신발은 벗지 않을 거야.’ 이미 탄천을 건너면서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자꾸만  지압로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에 시선이 갔다. '설마 이렇게 추운데 맨발로 걷는 사람이 있겠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멀리 덧버선을 신고 건너는 아주머니 한 분과,  딸 또래의 사내아이 둘이 보였다. 유독 하얗게 벗은 발이 눈에 들어왔다. 맨발이었다. 꼬마의 맨발을 발견한 순간 스르륵 잔뜩 긴장하고 있던 마음의 빗장이 풀렸다. 나도 용기를 내어 신발을 벗어보았다. 내가 신을 벗었다는 것은 딸에게도 신발을 벗어도 좋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양말을 벗지 않겠단다. 그런 딸이 왠지 얄밉게 느껴지는 내가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꼬마의 벗은 발을 보고 용기를 내어 신을 벗었고,  맨발로 서 있는 내가 무색하게  양말을 고수하는 또 한 명의 꼬마에게 야속한 마음을 비치는 유치한 어른이 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맨발이 생각보다 덜 시렸다. 첫 발을 떼자마자 “아악!” 하고 비명이 나왔다. 우리 둘 다 짧고 굵게 소리를 질렀다. 비명 소리에 딸아이는 웃으며 “엄마 소리 지르니까 꼭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아.”즐거워한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쏟아지는 비명에 이번에는 딸아이는 친절히 요령을 가르쳐 준다. “엄마 너무 따가우면 최대한 평평한 돌을 밟아봐.”

 맨발 지압에도 재미와 요령이 있다. 작은 돌, 큰 돌, 뾰족한 돌, 평평한 돌, 동그란 돌, 네모난 돌, 모난 돌... 구성과 조합이 코스마다 다르다. 한 코스 한 코스 통과할 때마다 잠깐의 고민이 스쳐간다. 평평한 돌만 밟으면 지압하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너무 뾰족한 돌만 밟으면 고통스럽다. 적당히 딸아이가 일러준 요령대로 뾰족한 돌을 밟다가 따가움을 참지 못할 때 그중에서 가장 평평해 보이는 돌을 골라 발을 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의 뇌는 바삐 움직였다.  지압로 한 코스 돌 때마다 보드 게임 한판을 끝낸 것 같았다. 이것이 맨발 지압의 묘미일까? 


두어 바퀴를 돌고 나서 발을 씻었다. 차가운 돌에 어느새 단련된 내 발이 물을 반겼다. ‘어라, 물이 생각보다 따듯하네.’ 흐르는 물에 발을 씻고 신발을 신어 본다. 지압 탓인가? 한 결 가뿐 해진 발걸음이 상쾌했다.


 딸아이는 할아버지와 다섯 바퀴, 나와 세 바퀴 총 여덟 바퀴나 돌았다. 마흔이 넘은 나도 몰랐던 지압로의 재미를 7살 딸아이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딸아이가 생각하는 지압로의 즐거움이 자뭇 궁금해졌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추위가 찾아오기 전에 다시 한번 공원의 지압로를 걸으며 꼭 그녀의 생각을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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