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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론산바몬드 Dec 26. 2022

망할 놈의 세정제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건강하기만 하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행복할 거라 믿었는데 어느 날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언젠가부터 소변을 보고 나면 거품이 심하게 일었다. 내 오줌발이 너무 강했나, 아님 소변의 낙차가 커서 그런가 하고 지켜보아도 거품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런 제길, 하필 내게... 분노의 단계는 빨리 왔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았다. 주원인은 당뇨병 또는 신장질환에 의한 단백뇨였다. 이 나이에 당뇨? 설마 아니겠지. 신장에 이상이 있는 거라면... 생각은 소변 거품처럼 커져 신장 투석과 신장 이식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죽을병은 아니었지만 마치 생을 곧 마감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은 절망감이 들었다. 신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직장, 지위, 가족 등 가진 모든 것을 저울질하다 생각이 비자금에 미쳤을 때 마음이 급 심란해졌다. 힘들게 아내 몰래 축적한 비자금 때문에라도 살아야 했다.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은 커졌다. 충격받을 아내를 생각하면 쉬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다. 한동안 고민하다 아내에게 사실을 말했다. 비자금 얘기는 안 했다. 아내도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정보 검색에 몰입했다.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불찰에 괜히 미안해졌다.


아내는 직접 소변을 보고 싶다고 했다. 물을 잔뜩 마시고 기다렸다. 방광에 신호가 왔을 때 힘차게 오줌을 뿜었다. 역시나 거품이 심하게 일었다. 거품은 뭉게뭉게 피어나 주변 거품과 하나 되며 세포 분열하듯 커졌다. 좌변기를 살펴보던 아내가 내 등을 치며 웃었다.

"저거 안 보여요?"

"...."


아내의 손가락은 좌변기에 걸려 있는 세정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앗, 그랬다. 아내가 코스트코에서 사다 변기에 걸어둔, 이름도 더럽게 긴 그것, '브레프 파워액티브 스파클링 레몬 변기세정제'. 이놈 때문에 생사를 넘나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까지 비자금을 실토하지 않은 내 인내심을 칭찬했다.


그 해프닝이 있고 나서 일주일 여가 지났을 때였다.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놈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 저...."

"응, 무슨 일?"

"지금 대학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저 소변에 거품이 많이 나서 검색해 봤는데요...."

아내가 밥을 먹다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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