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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론산바몬드 Mar 13. 2023

변소에서 웃고 있는 그녀

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달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6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서는 아랫집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 집에는 응식이, 상식이, 동식이, 종식이, 이름도 요상한 4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아들 네 명을 둔다는 건 저주에 가까웠다. 가끔 놀러 가서 보면 집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방은 창고를 방불케 했고 라면은 어찌나 처끓여먹는지 설거지 안 한 냄비가 부엌 바닥에 수북이 나뒹굴었다.


당시에는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일이 많았는데, 그 집이 그랬다. 아침이면 이놈들은 마당에 나와 밭은기침을 토해내다 동치미 국물 한 사발씩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곤 했다. 자주 그 모습을 보면서 한 두 놈쯤은 죽어야 저 집에도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안 죽었다. 생명력 질긴 놈들!


한 날은 그 집에 놀러 갔는데, 역시나 야수들의 집답게 방 한구석에 선데이서울이 뒹굴고 있었다. 아직 순진했던 나는 잡지를 설핏 넘기다 화들짝 놀라 그대로 덮었다.


맏이였던 응식이 이놈이 다가와 벌게진 내 얼굴을 보며 실실 웃었다.

"내 동생들하고 잘 놀아주니까 내가 선물로 주는 거야."

그러고는 잡지 한 장을 찢어 내게 건넸다.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육감적인 상체를 반쯤 드러낸 사진이었다. 이놈들은 역시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챙겨 나왔다. 사진이 상할까 봐 차마 접지도 못하고 가슴팍에 숨겨 집으로 돌아왔다.


단칸방에 살다 보니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볼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변소로 들어갔다. 냄새 지리는 푸세식 변소였지만 오롯한 나만의 공간이 거기밖에 없었다. 똥통 구멍 좌우로 다리를 벌리고 서서 사진을 감상하는데 난생처음 보는 야한 사진이 내 마음을 흔들었을까. 앗 하는 사이에 사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잡을 새도 없이 사진은 그대로 구멍으로 떨어졌다. 똥무더기 위에 하필 뒤집어지지도 않고 반듯하게 놓여버렸다. 화장실에 들어서는 방향에서 보면 모델의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난감했다. 그렇다고 사진을 꺼낼 방도가 없었다.


그날부터 폭식을 하기 시작했다. 많이 먹고 많이 싸서 사진을 덮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싸더라도 정확한 조준이 쉽지는 않았다.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녀의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한 달여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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