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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취 Apr 22. 2021

고무나무

 어른 키 허리 정도 오는 화분이 하나 있다. 남편의 대학 선배가 결혼 축하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벌써 7년, 부부가 함께 산 세월이다. 건조한 방에 두었다가 잎이 말린 적도 있었고 추위로 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메말랐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잘 크고 있다. 그랬다는 흔적이 남아 있긴 하지만.



 처음에는 이 나무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화분에는 '축 결혼'이라고 적힌 큰 리본이 달려 있었을 뿐이다. 무슨 나무인지 알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선물용 나무 화분' 검색해나온 사진들과 비교했다. 짙은 녹색의 매끈하고 둥글넓적한 잎이 눈에 들어온다. '갈 고무나무' 실내공기정화 식물로 빛을 많이 요구하나 환경에 잘 적응하는 편이어서 선물용으로 많이 팔리는 . 



 나무 모양과 잎을 열심히 관찰했더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같은 의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자주 가던 순댓국집 안에는 잎이 무성하고 튼튼한 고무나무가 있었다. 창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발육 상태가 좋아 보인다. 실내에서 잘 관리되는 나무를 보니 음식믿음이 . 경쟁적으로 부동산들이 모여있는 골목, 가장 후미진 가게 앞에도 고무나무가 있다. 잎이 다 떨어지고 줄기는 말라비틀어졌다. '축 개업' 리본만 황량하게 바람에 나부낀다. 한산한 가게 안 사장님의 마음이 이와 비슷하려나.

 


 인터넷에서 이주에 한 번 물을 흠뻑 주란다. 화분이 커서  한 바가지가 필요하다. 찰랑찰랑 넘치지 않게 들고 가 물을 붓는다. 받침대에 물이 보이면 오케이. 빛이 가장 잘 드는 거실의 창 앞에 화분을 갖다 놓았다. 우리가 처음 살았던 곳은 햇빛이 하루 종일 잘 들었다. 다만 8차선의 도로가  앞에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하루 종일 빵빵, 끼익 하는 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넓은 잎 위에는 까맣게 먼지가 쌓였다. 기공이 막힐까 봐 앞 뒷면을 닦았다. 까만 먼지가 흰 수건에 묻어나면 넓은 잎이 반질거렸다. 겨울이 왔다. 소음, 먼지, 추위 삼단 콤보에 창문을 닫았다. 그래서일까. 잎이 하나 두 개씩 누렇게 변하며 똑똑 떨어졌다. 다행히 봄이 되니 새 잎이 났다. 다음 해엔 잎이 떨어져도 또 나겠지 생각했다.


 

 그러다 이사를 갔다. 오래된 아파트였다. 부동산 아저씨에게 해가 잘 드는 남향이란 이야기들었는데 2층은 예외였. 주변 아파트 건물에 가려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단열도 취약해서 실내외 온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베란다에 놓았던 나무는 영하의 온도에서 잎들이 죄다 누렇게 변했다. 그제야 나무의 힘듬을 눈치채고 안으로 들여놓고 영양제를 꼽았다. 너무 늦었나 보다. 작은 줄기부터 메마르며 벌거숭이가 되어갔다. 내가 나무를 죽였구나. 잊을만하면 물을 주었다.  밖에 탐스런 하얀 수국이 필  연둣빛 여린 싹이 단단한 줄기를 뚫었다. 뱅갈 고무나무는 인도, 파키스탄 같은 더운 나라 태생이다.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살지 못한다. 하지만 묵묵히 기다려 적당한 시기에 잎을 다시 피워냈다. 굳센 생명력이 고마웠다.



 오랜 친구의 결혼식 날. 신부 대기실로 가는 길 한 귀퉁이에 고무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굵은 몸통, 동그랗게 무리를 이룬 무성한 잎. 내 고무나무와는 수형이 전혀 달라 다른 종류처럼 보인다. 지금 팔아도 될 것 같은 상품의 모습.  부랴부랴 식장에 자리를 잡았다. 주례사가 들린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무시당하는 남편은 되지 말아야...." 이 부분 가슴에 콕 박힌다. 듣다 말고 카카오톡을 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미안"



 7년 전 결혼식 날, 남편은 나보다 떨려했다. "신랑 입장" 걸어가다 중간에 잠시 멈칫, 뒤를 한번 보고 다시 걸었다. "신부 입장"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걷지 않았다. 넘겨지는 게 탐탁지 않았다. 신랑에게 날 데리러 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부케를 달라 했다. 내가 시킨 역할이다. 이것 때문에 긴장했나. 그의 손을 잡고 무사히 식장에 들어섰다. 이후 식은 A4 3장 분량 빽빽이 쓴 대본대로 끝이 났다. 신랑 신부 맞절에서 신부인 내가 훨씬 굽혀 인사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


회식한다고 전화를 안 받아?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 안 해? 주말인데 또 나가? 왜 화분에 물 안 줘? 나만 물 주는 사람이야?

 가족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 남편은 사회초년생. 내가 임원 부인이 될 수도 있다며 일에 아니 상사 부름에 했다. 저녁식사 메뉴를 같이 고민하고 밤 산책을 나갈 남편이 필요했다. 혼자였다. 아기를 낳은 후엔 둘이었다. 쉬는 날엔 시가에 가서 다섯이었다. 사랑받기 위해 선택한 결혼이었다. 오히려 점점 우울해졌다. 기대에 못 미치는 남편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감정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갈등을 피했다. 남편과 나의 잎은 우수수 떨어졌고 가지는 말라갔다. 



 우울증 약 봉투를 가지고 가족 여행을 갔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비행기표를 사는 건 일을 하며 생긴 습관이었다. 떠나기 전날 부고를 들었다. 할머니 장례식에 하루만 있었다는 죄책감은 약도 소용없게 만들었다. 몸은 태국 끄라비, 마음이 닿는 곳은  없었다. 멍한 눈,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어색한 표정의 사진이 핸드폰에 저장되고 있었다. 동생과 장례식에서 만나 몇 마디 나눴는데 작은 누나가 좀 이상하다 언니에게 말했나 보다. '할머니 장례식은 우리가 있으니 걱정 말고 넌 그냥 푹 쉬어'라는 메시지. 연락을 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데. 나는 여기까지 와놓고 왜 이럴까.



여행 마지막 날. 가기로 한 식당이 있었다. 조식을 많이 먹은 남편이 가지 말자 했다. 카페에 갔고, 할 말도 딱히 없었다. 냉랭한 분위기에 아이는 찡찡댔다. 그냥 나가자. 남편은 아이를 무등에 태운 후 앞질러 걸어갔다. 우린 멀리 떨어져 걸었다. 아스팔트 길이였다. 높은 턱이 있었다.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무등을 태운 채 턱을 넘으려 다리를 올렸다. 그 순간 남편은  중심을 잃었고 아이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먼저 떨어지며 쿵 소리가 났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달려가도 소용이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린 채 울다 지쳐 잠들었다. 낮잠인가? 기다렸다. 한 시간 후 아이는 눈도 못 뜬 채 울며 "엄마 어지러워"를 연신 외쳐댔다. 앰뷸런스를 타고 인근 큰 병원으로 갔다. 아이는 토를 했다.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수면제를 먹이고 CT를 찍었다. 의사가 출혈이 보인다고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차로 4시간 반을 가야 한단다. 아찔했다. 원래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하는 시각. 우리는 비행기 표를 다시 사서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직항이 없는 곳. 떨리는 손을 움켜 잡고 티켓 두 장을 샀다.



 공항에 가는 길. 아이는 또 한 번 게워낸다. 비행기는 연착되었고 터블란스가 심했지만 방콕에 도착하기만 간절히 바랬다. 이미 비행기는 30분 전에 출발했단다. 다시 비행기표를 샀다. 한국에 빨리 가야 한다. 가는 도중 피가 더 나면 정말 위험하다 했다. 두 번째 비행기를 탄 후 한국인 승무원을 만났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사정을 말하니 인천공항에 앰뷸런스를 대기시켜준다 했다. 의자에 앉으니 긴장이 풀리며 졸음이 밀려온다. 공항에 도착해 남편과 아이를 먼저 병원에 보낸 후 입국 수속을 처리하고 짐을 받았다. 택시를 잡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온몸이 덜덜 떨린다. 아이만 건강하다면 못할 게 없다.  



CT를 다시 찍었다. 다행히 추가 출혈은 없었다. 생긴 출혈도 흡수될 거라 했다. 일주일 입원을 예상한 것과 다르게 3일만 상태를 지켜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오래 집을 비워 한쪽 장판 아래를 벌레가 점령했다. 짐 가방을 풀어 세탁기에 옷을 넣는다. 베란다에 있는 호스로 나무에게 물을 흠뻑 준다. 집이다.



 다음 해 이사를 했다. 아침부터 1시까지 햇빛이 들어오는 남동향 5층. 볕이 제일 잘 들고 환기도 잘되는 창 바로 아래에 나무를 두었다. 긴 나뭇가지에 끝만 잎으로 무성한 나무. 거쳐온 시간이 만들어낸 고무나무 만의 수형. 상처도 부끄러움도 아니다. 



7년째 같이 크는 고무나무

 


맨 위 사진 출처

https://m.blog.naver.com/hbrbm77/222268239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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