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기대 없이 올린 잡지 사진 한 장을 얼굴도 모르는 싱가폴 고객에게 30,000원에 판매한 이후, 나는 집에 있던 잡지의 아이돌 사진을 닥치는 대로 오렸다. 10대 시절에도 안 모으던 아이돌 가수의 사진을 30대가 되어 눈에 불을 켜고 모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시절 해외에서 인기가 있던 가수는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2PM 등이다. 첫 판매와 동일하게 잡지의 광고지면 한 장을 1,000원부터 경매로 올렸는데 거의 다 2만원 이상의 가격에 팔렸고, 고객들의 주소는 필리핀, 싱가폴, 브라질, 미국, 유럽 등 아주 다양했다.
고객들이 얇은 잡지 사진을 받고 가격 대비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상품을 받은 고객들이 후기를 아주 좋게 남겨주셨다. 포토샵을 할 줄 몰라서 보정 없이 핸드폰 카메라로 정직하게 찍은 상품 사진이 오히려 플러스가 되었다. 의도치 않게 고객들의 기대를 미리 꺾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 고객들은 상품 사진을 포토샵과 주변의 소품으로 ‘있어 보이게’ 꾸미는 것보다 정직하게 단점도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이쯤 되니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연예인 사진이 다 돈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주변에 보이는 모든 아이돌 사진을 상품화 하게 된다. 집에 있던 잡지 속 사진은 다 팔았지만 이미 몇 달 전의 과월호라 사진을 더 구하고 싶어도 구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이후에 eBay에 판매했던 나의 다른 상품들이다.
1. 소녀시대 음료수 병
이 상품은 사진만 찍어 올려놓았다가 재고 걱정 없이 주문 들어오는 대로 편의점에서 사서 해외로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간편했다. 멤버 별 낱개로도 판매하고 9병 세트로도 판매했다.
2. 베스킨라빈스의 증정용 포토카드
새로 출시된 맛 아이스크림을 사면 무료로 주던 포토카드도 낱장으로는 7,000-8,000원, 6명 세트에 35,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팔 수 있는 훌륭한 상품이었다. 그 시절 나는 지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포토카드만 가져가는 아이스크림 산타였다.
3. 화장품 로드샵 브랜드에서 배포하는 연예인 브로마이드, 아이돌 얼굴이 인쇄된 사탕 봉지 등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일을 사업으로 발전시킬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이런 상품이 해외에서 잘 나가다니 신기했고, 주문이 많이 들어와 신이 나서 계속 하다 보니 자꾸만 다른 상품들이 눈에 들어와 재미로 판매했던 것이다. 다만 회사에서 매일 새벽까지 야근하던 ‘일 열심히 하는 버릇’이 남아있었고, 이건 회사와 달리 내가 잘 하면 할수록 수익이 바로 생기는 ‘진짜 내꺼’라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열심히 하긴 했었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매일 새벽까지 eBay 속의 상품들과 다른 사람들이 판매하는 것을 들여다 보며 상품 연구를 하였으니 말이다. 특히 해외 판매다 보니 시차가 있어 잠을 자고 있는 밤에 주문이 많이 들어왔는데, 아침마다 eBay 앱에 돈 들어오는 소리(쨍그랑!)에 눈뜨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나는 푹 자고 있었을 뿐인데 간밤에 통장에 돈이 $300-$500씩 들어와 있었으니 재미가 없을 수 없었다.
eBay를 시작한지 한 3개월 정도 됐을까? 이젠 좀 제대로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해외 시장의 수요는 확인했으니 공급이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품을 찾고 싶었다. 저렇게 프로모션 용으로 나오는 포토카드나 브로마이드는 신제품 프로모션 기간이 끝나면 더 이상 상품을 구할 수가 없고, 한국에서도 워낙 인기 있는 연예인이다 보니 상품을 지속적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제대로 ‘상품 소싱’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경험이었다. 도매로 한류상품을 사고 싶은데 도매 거래는 어떻게 하는 건지, 한류 상품은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유튜브에 정보가 넘쳐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다 물어봐도 도매 소싱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하나는 알려주었다. “남대문하고 명동에 가면 일본인 상대로 조그맣게 연예인 사진을 파는 가게가 많이 있다.” 라는 것.
그 말을 들은 나는, 그 주 주말에 바로 조그마한 캐리어 하나를 들고 무작정 남대문으로 향했다. 듣던 대로 2-3평 정도 되는 작은 가게에 배용준, 원빈 등 유명 배우들의 브로마이드가 잔뜩 걸려있었고 일본인 관광객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호기롭게 캐리어를 끌고 왔지만, 주말이라 바쁜 가게 안에 들어가 사장님께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사장님이 바쁘다고 화내면서 가라고 하진 않을까? 바보.. 일단 명함이라도 좀 맞춰오지 그랬어. 그래야 좀 비즈니스 하는 사람 같잖아~ 사장님이 내가 모르는 도매 전문용어로 얘기하면 어떡하지?’ 등등.. 가게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구석에서 30분 동안 혼자 들어가지도 못하며 오만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가게에 손님이 없는 한가해진 시간을 틈타 매장 안에 들어갔다.
매장 안에 들어가니 ‘우와~ 이건 무조건 잘 나가겠다’ 싶은 물건들이 꽤 있었다. 그렇게 물건을 조금 둘러보며 속으로 심호흡을 하다가,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드디어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제가 eBay라는 해외 쇼핑몰을 통해서 아이돌 사진을 좀 팔아봤는데 판매가 잘 되더라고요. 괜찮으시면 여기 있는 물건 종류별로 하나씩만 우선 사서 해외에 좀 팔아보고 싶은데, 얼마 정도에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아주 흔쾌히, 판매 가격의 50%에 주시겠다는거 아닌가? 베테랑인 사장님 보시기엔 초짜 티가 물씬 났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사업을 하고 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외 판매라고 하니 좋아하시며 잘 해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래서 난 기분 좋게 그곳에서 잘 팔릴 만한 아이템을 우선 하나씩만 샀고, 추가 주문이 들어오면 사장님께 택배로 물건을 보내달라고 하며 첫 도매 계약을 성사시켰다.
내가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너무 잘했다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첫째, 지나가다 우연히 관심이 생기는 모임에 문을 열고 들어가서 eBay를 알게 된 것. 둘째, 처음에 올린 9개의 상품은 아예 반응이 없었지만 그래도 10개는 올려보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 더 올려본 것이다. 사실 그 영어회화 모임 장소에서 “직장인 투잡 모임”의 모집 글을 본 사람은 약 5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 문을 두드린 것은 나를 포함한 5명 뿐이었다. 그리고 함께 스터디를 시작한 다른 분들은 한달 정도 하다가 수익이 많이 나지 않자 대부분 그만두었다. 그래도 나는 그냥 재미있어서 계속 했다. 돈을 투자한 것이 없으니 조금만 팔려도 기뻤다. 뭘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가볍게 시작했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장난 레이저 포인터를 인터넷에 올렸다가 거대한 시장의 가능성을 본 이베이의 창업자처럼 나도 재미 삼아 물건을 올렸다가 가능성을 보았다. 이게 잘 될지 안될지 너무 많은 고민을 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운 후 시작을 했으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거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을 때 크게 상심을 했을 것 같다. 그리고 너무 많이 준비하다가 오히려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을 수도 있다. 나는 포토샵도, 상품사진 찍는 법도 몰랐고 심지어 아이템도 없었지만 운 좋게 ‘한류 초기시장’을 봤고 이것 저것 올려보며 바로 테스트를 해봤기 때문에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사업자 등록과 같은 행정적 절차, 해외 관세, 해외 배송, 세무, 노무는 이후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내가 이후 15년 동안 사업을 하며 느낀 점은 이것이다. 적당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좋지만 그러다가 너무 많은 시간과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 때로는 내가 완벽하게 준비한 계획보다 갑자기 보이는 신문의 한 문구에서, 우연히 눈에 띈 잡지 사진에서 큰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