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의 나는 그렇게 내 20대를 오롯이 바쳤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 이후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우선은 그냥 숨을 좀 쉬고 싶었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 나온 것뿐이니까.
뭐가 문제였을까. 오랜 기간 꿈을 꾸었고,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고,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좌절했다. 공허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배운 적이 없었다. 치열하게 노력하여 꿈을 이룬 위인들의 이야기, 일반인들의 성공 스토리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왔지만 그래서 그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았는지와 그것이 진짜 성공이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우선은 잠을 실컷 잤던 것 같다. 그리고 몸이 휴식에 적응되어 갈 때쯤, 회사 다닐 때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유럽여행을 다시 가기로 했다. 23살 대학생 때 한 달 배낭여행 갔던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있어서, 퇴사하면 무조건 다시 가야지~ 하고 나를 버티게 했던 것을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가는 김에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자! 이제 회사는 죽어도 가기 싫으니, 유럽에 사업 아이템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기차여행은 예전에 다녀왔으니, 이번엔 기차가 닿지 않는 유럽의 중소도시 위주로 자유롭게 자동차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었던 것이다. 아.. 그래도 유럽 자동차 여행은 가고 싶은데… 예전 기차 타고 지나가던 길에 본 소도시가 너무 예뻤는데… 하고 아쉬워하다가, 내 인생 첫 리더짓(?)을 도모하였다.
‘내가 운전을 못하면, 운전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가면 되잖아? 팀을 꾸리자.’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바로 유럽 자동차 캠핑 여행을 기획하였다. 나 포함 5명 팀을 구성하여 차량 렌트비를 쉐어 하고, 장기간 여행이라 숙박비용도 많이 나올 테니 캠핑으로 유럽 소도시를 여행하는 컨셉이었다.
우선 2달치 일정을 기획하고, 팀원들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 유럽 여행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저는 이런 도시들을 2달 이상 자동차로 여행하며 캠핑으로 비용을 아낄 계획입니다. 함께 갈 동반자 4명 구합니다. 그중 3명은 교대로 드라이버 역할을 하고, 저 포함 2명은 캠핑 시 식사를 준비합니다. 함께 하실 분은 자기소개와 함께 쪽지를 보내주세요."
이렇게 글을 올리면서도 사실 누가 지원할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2달-4달이나 장기간 여행이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걱정도 잠시, 하루 만에 약 50명의 지원자가 쏟아졌다. 함께 가고 싶다고 사연도 어찌나 구구절절 절박하게 적었던지.. 솔직히 놀랐다. 이게 그 정도의 여행 계획인가 하고..
자기의 마지막 유럽 여행이 될 것 같으니 꼭 끼워달라는 50대 어머님부터 밥 잘한다는 40대 주부님, 운전 하나는 자신 있다는 화물차 기사님, 방금 전역해서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 내 짐까지 다 들어준다고 꼭 데리고 가라는 20대 초반 청년까지. 20대부터 60대의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사연으로 지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그들 중 나이와 자기소개 내용으로 1차 멤버 10명을 추리고, 2차로는 면접을 봐서 최종 인원을 구성하였다. 최종 멤버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여자 둘, 남자 하나, 그리고 40대 초반의 남자 한 명. 나까지 총 5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때 너무 아쉬운 게 있다. 저 두 명의 남자들을 그냥 내 이상형으로 뽑았어야 하는 건데…! 심지어 면접 볼 때 괜찮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내 신랑이 옆에서, 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비웃는다. 난 여행 팀 내에서 연애 문제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아서 일부러 내 이상형이 아닌, 나와 절대 잘 될 수 없는 남자들만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데리고 갔는데, 유럽에서 러브스토리가 생길 수 있는 그런 일생 최대의 낭만적인 기회를 내 손으로 날려버리다니… 순진했던 내 29살 청춘이 아깝기 그지없다. 이 바보.. 멍충이..!!ㅠ.ㅠ)
어쨌든, 그렇게 순전히 기능적으로 구성된 우리는 영국에서 방 2개와 거실이 있는 큰 텐트를 구매하고 파리에서 씨트로엥 5인승 자동차를 리스하여 2달간 유럽 자동차 캠핑여행을 함께 하였다. 이 여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 나올 많은 우여곡절과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 글은 여행기가 아니니 그곳에서 내가 깨달았던 결론만 간단히 이야기하려고 한다.
결론 1) 면접 보기 전과 합격 후의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접 전의 반짝이는 눈빛과 열정, 뭐든지 리더 말대로 다 따르겠으니 데려만 가 달라는 말을 믿으면 안 된다. 가기 전 나의 소도시 여행 컨셉에 동의하고, 자기는 어디를 가도 좋으니 무조건 데려만 가달라던 40대 남자분은, 유럽에 간지 3일 만에 “유럽에 왔는데 런던과 파리를 안 가는 게 말이 되냐. 왜 그 옆 소도시만 가냐”라고 나에게 따졌다.
결론 2)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사람은 다 다르다.
우리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밤마다 이후 일정에 대한 회의를 하였다.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동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 얘긴 안 하지 않았냐. 왜 말을 바꾸냐”라고 따지는 사람이 나왔다. 나는 A라고 이야기했는데 자기 혼자 B로 생각하고선, 왜 나한테 B를 안 하냐고 화를 냈다. 나와 비슷한 환경의 또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들만 만나온 20대 후반의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어떻게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저렇게 다르게 알아들을까?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지? 나와 완전히 다른 인간을 아주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탐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서로 날것의 모습이 더 잘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장기간 여행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 여행이 아니면 서로 다시 안 만나도 되고, 이 여행이 끝나면 또 언제 유럽에 올지 모르니 각자 더 욕심을 부려 자기 목소리를 냈던 것 같다.
결론 3) 나중에 결혼할 사람과는 꼭 적어도 한 달 이상, 힘든 곳에서 해외 장기여행을 해봐야겠다.
우리 갈등은 주로 드라이버 3인과 요리하는 2인 간의 갈등이었다. 드라이버들은 자기들이 운전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했고, 밥을 하는 2인은 “내가 유럽까지 와서 아침저녁으로 밥만 해야 하냐. 밥을 이렇게 많이 하게 될 줄 몰랐다”라고 했다. 여행 한 달이 넘어가고 피로가 쌓일수록 싸움은 더 잦아졌고, 급기야 나중에는 드라이버팀과 요리팀 두 파로 나뉘어, 차만 같이 타고 모든 일정을 따로 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나중 결혼할 사람과는 꼭 극한 상황에서 한 달 이상 같이 여행을 해 봐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그 사람의 본성을 더 잘 알 수 있고, 서로 힘들 때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는지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결론 4) 아무리 좋은 곳을 여행하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안 맞으면 하나도 즐겁지 않다.
그렇게 고대했던 유럽여행인데 같이 간 사람들이 안 맞고 매일 싸우니,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감흥이 별로 없었다. 마음이 불편하니 아무리 예쁜 풍경을 봐도 좋지 않았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며 돈 많이 벌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 뭐 하겠는가.
주위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없고 맨날 싸우기만 하면 그게 바로 지옥일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인생도 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재미있다.
탈 많았던 우리 팀은 비용을 미리 쉐어했던 2달만 자동차 여행을 한 후, 그 후 각자 마음 맞는 사람과 팀을 구성하여 따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식사팀이었던 나는 같이 식사를 준비하던 언니와 그 이후 둘이서만 2달 더 기차여행을 하다가 한국에 왔다. 2달간의 유럽 자동차여행은 지금 생각하면 여행이라기보다 리더십캠프처럼 기억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경험이 나의 리더십과 팀원 구성능력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