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파노 Apr 04. 2022

정체성

벌레

제인(Jane)에게 나는 인격이 없는 도구였다. 제인은 아홉 살이었고  또한 아홉 살이었다. 제인은 부잣집 여자아이였다. 항상 옷차림도 말끔했고 몸에서 좋은 비누냄새도 났으며 머리카락에서는 항상 고급 샴푸 향기가 나곤 했다. 그에 비해 나는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가정의 경제상태가 나의 외모에는 그대로 드러났다. 세수는 이틀에   꼴로 했고 머리는 3일이나 4일에 한번씩 감았다. 더운물이 수도에서 나오는 구조의 집에 아니었기에 더운물로 씻는 일은 매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할머니의 냄새가  몸에서는 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제인은 싫어했다. 더욱 싫었던 이유는 제인과 나는 같은 책상을 사용하는 짝꿍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인은 제법 공부도 잘했다. 나처럼 맞춤법이 틀리는 일도 없었고 구구단도 척척 외웠다. 그에 반해 나는 맞춤법을 몰라 손바닥에 불이 나기 일쑤였고 구구단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만큼이나 어려운 숫자의 세계였다.

 

같은 책상을 사용했던 제인과 나는 3.8도선을 책상의 중앙에 그어 놓았었다. 내 물건이나 몸이 그 선을 넘을 경우에 제인은 나를 사정없 꼬집거나 때리곤 했다. 제법 아팠다. 제인이 나를 응징하는 힘의 강도로 보아 나를 벌레와 같이 싫어함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홉 살의 나는 억울하지 않았다. 제인이 부여한 낮은 정체성을 그대로 수용하며 나의 날들을 살아갔다. 그렇게도 미련스러운 날들을 살아가던 중 내 안의 내가 그녀가 부여한 정체성을 부인하며 꿈틀거리는 사건이 있었다.

 

산수 익힘책이라는 교과서로 기억이 된다. 제인은 그 교과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 책을 잃어버린 걸 알고 난 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준비하지 않는 문제아로 보이는 것이 두려웠고 더욱이 그에 상응하는 체벌로 손바닥을 맞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제인은 그때까지 한 번도 손바닥을 맞아본 일이 없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산수 시간이 다가오기 몇 시간 전부터 제인은 나에게 사탕이며 입맛을 돋울만한 불량식품들을 먹이기 시작했다. 흡사 가축으로 키우는 도가 좋은 고기로 도축이 되길 바라며 여물을 먹이듯 말이다.

 

“있다가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책 검사하면 너의 책을 나의 책이라고 말해주는 거야! 알겠지? 내가 지금 이렇게 너에게 사탕을 사주잖아!"

 

아홉 살의 영악한 머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홉 살의 그녀에게 아홉 살의 나는 똑같이 체벌을 두려워하는 인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사탕을 맛을 본 나는 체벌도 두렵지 않고 선생에게 문제아로 보이는 것도 두렵지 않은 그런 인격이 없는 아이여야만 했다. 나는 그녀가 주는 사탕을 모조리 받아먹고 그녀의 말에 동조를 했다. 산수 시간이 되어서 선생님이 책 검사를 할 적에 누구의 책이냐 묻는다면 난 꼭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대답을 해주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녀는 부잣집 도련님들에게만 보이는 싱그럽고 달콤함 미소를 나에게도 보였다. 산수 시간이 되었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은 늘 그 시대의 선생들이 가지고 다니면 몽둥이를 휘두르며 우리 책상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우리의 책상 위에 교과서가 한 권뿐인 것을 발견했고 선생은 이내 근엄한 목소리로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누가 책을 안 가져온 거야? 손바닥을 맞아야겠구나!”

 


그 순간 제인은 팔로 내 어깨 죽지를 밀며 나에게 약속한 대로 말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나 또한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가 부여한 정체성을 갖지 않기로 다짐한 내가 말을 했다.

 

“선생님! 제인은 책을 가져오지 않았어요! 이 책은 제가 가져온 것인데 가져오지 않은 제인이랑 같이 보는 거예요!”

 

그 말에 당연히 문제아는 나인 줄 알았던 선생은 표정을 재빨리 바꾸며 제인을 바라보았고 자신 스스로도 제인에게 체벌을 가해야 하는 상황이 낯선지 몇 번의 침을 삼킨 뒤, 제인에게 손바닥을 내밀라고 지시를 했다. 그렇게 선생은 제인에게 체벌을 있는 힘껏 가했고 제인은 그대로 고개를 책상에 파묻어 숙인 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날 나는 그녀의 흐르는 눈물로 그녀가 부여한 벌레와도 같은 정체성을 미안하고도 통쾌하게 씻어내었다.

작가의 이전글 불놀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