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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3조, "권리능력의 존속기간"

by 법과의 만남
제3조(권리능력의 존속기간)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민법 제2장 "인"이 시작됩니다. '인'은 사람이란 뜻이죠.

제3조가 시작되기 전 제1절의 제목은 "능력"입니다. 이제부터는 민법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권리능력이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지위 또는 자격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권리능력이 있다는 것은 법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행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권리능력은 민법에서 자연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권리능력은 인간이면 다 가지는 것이 타당하겠죠? 때문에 우리 민법은 성별, 인종,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생존한 동안 권리능력을 가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생존한 동안 권리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출생'하면서 권리능력을 갖게 되고, '사망'하면서 권리능력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출생과 사망은 무엇을 기준으로 나눌까요? 단순해 보이는 문제이지만, 법에서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출생과 사망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누군가는 뇌사상태를 사망이라고 볼 수 있지만, 누군가는 뇌사상태만으로는 사망이라고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출생에 관하여, 우리의 통설은 태아가 모체로부터 전부 노출한 때에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전부노출설). 때문에 태아가 모체로부터 절반만 나왔을 때에는 아직 권리능력이 없는 것이고요, 뱃속에 있는 경우에도 권리능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온전히 모체 밖으로 나오면 그때부터 권리능력을 갖는 것이지요. 물론 태아가 모체로부터 다 나오기는 했는데 죽어서 나왔다면(사산),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권리능력은 없습니다.


사망에 관하여, 우리의 통설은 사람의 호흡과 심장의 기능이 영구적으로 정지한 때로 보고 있습니다(심장정지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뇌사상태의 경우 심장박동이 정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죽은 것은 아니며, 권리능력을 온전히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논리에 따르면 태아는 어떠한 경우에도 권리능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전부노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하지 못한 상태), 이렇게 되면 불합리한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철수는 영희와 결혼했고, 영희는 철수의 아들(민수)을 가진 임산부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철수는 민수가 태어나기 1달 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영희는 민수를 낳았지만 민수를 키울 생각이 없어 버릴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다 보니 아주 슬픈 사례를 들게 되네요.


영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철수의 사망 당시 민수는 태아였고 권리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철수의 재산도 상속받지 못하며, (철수의 다른 가족은 일절 없다고 가정합니다) 자신이 철수의 모든 재산을 다 상속받았기 때문에 민수에게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갓난아기인) 민수는 그렇다면 자신이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일까요?


이처럼 태아라고 해서 모든 권리능력이 없다고 못 박아 버리면 "태아가 태어난 후에도" 그를 전혀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국가에서는 입법을 통하여 태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법 역시 개별적으로 별도의 조문을 두어, 특수한 경우에는 태아라고 할지라도 이미 태어난 것으로 봄으로써 민수를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그 특수한 경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태아라고 할지라도 불법행위에 의한 피해자가 되는 경우에는 가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제762조(손해배상청구권에 있어서의 태아의 지위) 태아는 손해배상의 청구권에 관하여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


무슨 말일까요? 예를 들어 철수의 교통사고가 석돌이의 고의로 발생한 것이라고 합시다. 민수가 어엿한 성인이었다면 당연히 민수는 유족으로서 아버지인 철수의 생명침해에 대하여 석돌이에게 재산상 및 정신상의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습니다(유족도 당연히 피해자이니까요). 그런데 민수가 태아인 경우에도 민법 제762조는 민수가 '출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줌으로써, 살아서 태어난 후 석돌이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해 준 것입니다. 물론 한글도 떼지 않은 갓난아기인 민수가 현실적으로 석돌이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수는 없지만, 이론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소송은 영희가 대신하여야겠지요.


2. 태아인 시절에 가족의 죽음으로 상속의 문제가 발생하면, 태아는 권리능력이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속순위에 당당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제1000조(상속의 순위) ①상속에 있어서는 다음 순위로 상속인이 된다.
1.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2. 피상속인의 직계존속
3. 피상속인의 형제자매
4. 피상속인의 4촌 이내의 방계혈족
②전항의 경우에 동순위의 상속인이 수인인 때에는 최근친을 선순위로 하고 동친등의 상속인이 수인인 때에는 공동상속인이 된다.
③태아는 상속순위에 관하여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본다.


민수가 태어나기 1달 전에 철수가 죽었습니다. 민법은 상속은 (피상속인 철수가) 사망한 때 개시한다고 하고 있으므로, 철수의 사망시점에 제1000조에 따른 순위에 따라 상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갑작스러운 사고여서 철수의 유언은 따로 없었습니다). 제1000조제3항에 따르면 민수는 태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제1항제1호의 '피상속인의 직계비속'(아들)으로서 제1순위 상속자가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상속은 민법 제1000조에 따른 순위대로 정해지며, 선순위에서 상속이 이루어지면 나머지 상속인은 후순위가 되어 상속받지 못하게 됩니다.

제1003조(배우자의 상속순위) ①피상속인의 배우자는 제1000조제1항제1호와 제2호의 규정에 의한 상속인이 있는 경우에는 그 상속인과 동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고 그 상속인이 없는 때에는 단독상속인이 된다. ②제1001조의 경우에 상속개시전에 사망 또는 결격된 자의 배우자는 동조의 규정에 의한 상속인과 동순위로 공동상속인이 되고 그 상속인이 없는 때에는 단독상속인이 된다.

제1009조(법정상속분) ①동순위의 상속인이 수인인 때에는 그 상속분은 균분으로 한다.
②피상속인의 배우자의 상속분은 직계비속과 공동으로 상속하는 때에는 직계비속의 상속분의 5할을 가산하고, 직계존속과 공동으로 상속하는 때에는 직계존속의 상속분의 5할을 가산한다.


우리 민법은 피상속인의 배우자는 제1순위 상속자가 있는 때에는 그와 동순위자가 된다고 된다고 하였으므로(위의 제1003조 참조), 결과적으로 민수와 영희는 철수의 재산에 대한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제1009조제2항에서 배우자의 경우 50%를 가산하게 되어 있으므로, 영희 : 민수의 상속비율은 1.5 : 1 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수는 철수의 재산 중 일부는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므로,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영희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됩니다.


3. 태아는 유언에 의하여 재산을 물려받는 때에는 유언의 효력 발생 당시 출생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제1064조(유언과 태아, 상속결격자) 제1000조제3항, 제1004조의 규정은 수증자에 준용한다.


제1064조는 앞서 보여 드린 제1000조제3항을 준용하고 있습니다. 준용이란 A에 관한 법령 또는 규정을 그와 유사한 사건 또는 사항인 a에 대하여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단순한 '적용'과는 다르니 유의하세요). 유증이란, 유언을 통하여 재산을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유증의 경우는 앞서 말한 상속(철수가 유언을 남기지 않고 사망한 경우)과는 좀 사안이 다르지만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니 해당 규정을 준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철수가 교통사고가 아니라 암으로 사망했다고 바꿔 생각해봅시다. 철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영희의 뱃속에 있는 민수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유언을 했습니다. 민법에 의하면 유언은 유언자가 사망한 때로부터 그 효력을 발생하므로, 민수가 태어나기 1달 전 철수가 사망함으로써 유언은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도 민수(수증자)는 태아이지만 출생한 것으로 간주되어 유증을 유효하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민수는 살아서 태어난 후 자신이 철수의 유언에 따라 재산을 물려받았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4. 태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부터 그 자녀임을 승인받을 수 있습니다.

제855조(인지) ①혼인외의 출생자는 그 생부나 생모가 이를 인지할 수 있다. 부모의 혼인이 무효인 때에는 출생자는 혼인외의 출생자로 본다. ②혼인외의 출생자는 그 부모가 혼인한 때에는 그때로부터 혼인 중의 출생자로 본다.
제858조(포태중인 자의 인지) 부는 포태 중에 있는 자에 대하여도 이를 인지할 수 있다.


이번에는 철수와 영희가 실은 불륜관계였다고 해봅시다. 점점 아침드라마가 되어 가네요. 철수에게는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따로 있습니다. 영희는 그것도 모르고 철수와 사귀다가 민수를 낳게 된 것입니다. 철수가 자신의 부인과 낳은 자식이라면 당연히 철수의 아들로 등록되겠지만, 영희가 낳은 민수는 사실 세상 사람들로서는 누가 그 아버지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에 철수는 혼인 외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인 민수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함으로써 온 세상에 민수의 아버지가 자신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입니다.


인지에 관해서는 따로 길게 설명하여야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제858조만 보겠습니다. 인지는 그의 생부나 생모의 승인을 통하여 법률상 친자녀관계를 생기게 하는 단독행위이므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철수는 민수가 태아인 시절부터 이미 민수를 너무 사랑하여, 자신의 아들로 보살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를 하였는데, 민수가 태어나기 전에 그만 교통사고로 사망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에는 철수가 한 '인지'를 민수가 태아일 때 유효하게 받은 것으로 인정하여, 민수를 철수의 아들로서 확실히 해둘 필요성이 생깁니다. 민법 제858조는 이를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수의 본처 입장에서는 철수와 영희가 참 밉겠지만, 그래도 갓난아기인 민수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민수는 보호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부노출설'에도 불구하고 태아를 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4가지의 예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더 있습니다. 태아가 위의 4가지 예외에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사산된다면 의미가 있을까요? '사망'으로 인간은 권리능력을 잃는다고 했습니다. 태아가 사산되면, 제아무리 손해배상청구권이나 유증을 받았더라도 말짱 헛것입니다. 결국 일단은 '살아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법에서 말하는 '출생한 것으로 본다'의 해석에 대해서도 사실 견해가 갈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지조건설과 해제조건설의 다툼인데, 여기서는 무리해서 정지조건과 해제조건의 법리까지 공부하지는 말고 그냥 판례가 정지조건설을 취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 둡시다.


짧게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만 하세요. 정지조건설에 의하면 철수가 사망한 때에 태아인 민수는 위의 법리에 따라 1순위 상속자가 되고 권리능력을 취득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어차피 태아인 동안에 그의 상속을 대행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민수가 살아서 태어날 때에 철수가 사망한 시점으로 소급하여 권리능력을 취득한다고 봅니다. 반면 해제조건설에서는 철수가 사망했을 때 이미 민수는 태아지만 권리능력을 취득하였고, 사산되는 경우에는 그 권리능력을 잃게 된다고 봅니다.


정지조건설이나 해제조건설이나 결국 태아가 살아서 태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건 똑같습니다. 오늘은 가장 기초가 되는 권리능력에 대하여 공부하다 보니 혀가 굉장히 길어졌네요. 내일은 좀 더 짧게 공부하겠습니다.


*이 글은 교양을 위한 것으로, 실제 소송수행이나 법률 상담을 위한 목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법률사무소를 찾아 정식으로 상담을 받으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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