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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2조, "신의성실"

by 법과의 만남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②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 같습니다.

민법 제2조에서는 민사 관계법을 통틀어 가장 많이 나오는 원칙 2개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1. 신의성실의 원칙


제2조제1항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줄여서 신의칙이라고도 부릅니다. 자신이 가진 정당한 권리라고 하더라도 이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고의적으로 해치려고 하거나, 자신이 마땅이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더라도 상대방의 이익을 함부로 해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짧게 줄이면 이런 뜻입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따라서 해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철수는 민수에게 자신의 24평 아파트 1채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철수는 아파트 주변에 공동묘지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민수에게 이를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민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요. 민수는 아파트에 입주하고 나서야 아파트 코앞에 대규모 공동묘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 옆에 공동묘지가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요? 집 사신 분들은 알겠지만 집값 하락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민수는 매우 화가 납니다. 거기다 아이들도 무섭다면서 이사를 가자고 졸라 댑니다.


이처럼 민수가 공동묘지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아파트를 사는 의사결정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우리 국민 모두가 다 아는데도 철수는 이걸 얘기해주지 않았는데요,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상 '성실'하지 못한 행위가 됩니다. 결국 민수는 계약을 취소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대판 2006.10.12, 2004다48515).


2.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


제2조제2항은 "권리남용 금지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도 그걸 남용하지는 말라는 거죠. 제1항과 무슨 차이냐고요? 보통 제1항을 위반하면 제2항에도 해당되게 됩니다. 통설과 판례는 대체로 권리의 행사가 신의칙에 위반하는 때에는 권리남용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희는 시골에서 토지 1천 평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옆집에 사는 다정이가 창고를 개축하려고 하자, 자신의 토지 중 일부(100평)를 돈 받고 팔았습니다. 다정이는 영희에게 산 땅에다가 창고를 넓혀 지어서 2년간 잘 써먹었지요.

그런데 옛날에는 측량기술이 지금보다 덜 발달된 것도 있었고, 사람들이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뭐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 하는 거지요. 영희와 다정이는 분명 이 정도면 대충 100평쯤 되겠거니 하고 거래를 했는데, 나중에 영희가 알고 보니 다정이의 창고가 103평의 땅을 쓰고 있는 겁니다. 영희의 땅을 3평 정도 침범한 것이지요. 영희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동안 자기 땅을 공짜로 2년간 써 왔으니 10억 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아니면 소송을 하겠다고 합니다.


영희는 분명 3평 토지의 소유자입니다. 즉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권리를 '남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고작 3평의 땅을 2년 썼다고 해서 10억 원을 내놓으라 하다니, 사회적으로도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우 다정이는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영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정이가 영희의 땅을 공짜로 꿀꺽할 수는 없으므로 소송 또는 협의에 따라서 정해지는 적정한 가격에 토지를 사든지 땅세를 내든지 해야겠지요. 그래도 10억 원은 과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본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민법 제2조는 너무 표현이 모호하지 않나? 도대체 신의는 누가 정하는 거고 성실하다는 건 누가 정하는 건데? 도대체 기준이 뭐야?"

그렇습니다. 그 말대로 민법 제2조는 신의가 무엇인지, 성실이 무엇인지 전혀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지 않아요. 추상적입니다. 때문에 제2조를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법조문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추상적인 용어로 법률상의 요건을 정하여 여기저기 끼워넣기 편한 조항을 일반조항이라고 합니다. 일반조항은 함부로 아무 데나 갖다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이렇게 일반조항을 막 써먹는 것을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라고 합니다), 다른 법률이나 관습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고서도 타당한 결론을 얻기 힘든 상황에서 보충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신의칙과 권리남용 금지 원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신의칙은 워낙 중요한 원칙인 만큼 그로부터 파생되는 원칙(모순 행위 금지의 원칙, 실효의 원칙, 사정변경의 원칙 등)도 많은데요, 나중에 조금씩 보겠습니다.


*이 글은 교양을 위한 것으로, 실제 소송수행이나 법률 상담을 위한 목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 드립니다. 그런 상황이 오신다면 법률사무소를 찾아 정식으로 상담을 받으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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