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조(종류채권) ①채권의 목적을 종류로만 지정한 경우에 법률행위의 성질이나 당사자의 의사에 의하여 품질을 정할 수 없는 때에는 채무자는 중등품질의 물건으로 이행하여야 한다.
②전항의 경우에 채무자가 이행에 필요한 행위를 완료하거나 채권자의 동의를 얻어 이행할 물건을 지정한 때에는 그때로부터 그 물건을 채권의 목적물로 한다.
우리가 어제 공부했던 급부의 종류를 생각해 봅시다. 특정물과 불특정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특정물급부의 경우, 다시 금전급부와 금전급부가 아닌 그 밖의 종류물급부로 나누었습니다. 오늘 공부할 제375조는 바로 불특정물급부 중 하나인 '종류채권'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종류채권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종류채권에서의 ‘종류’(種類)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종류’의 단어가 맞습니다. 즉, 종류채권이란 일정한 ‘종류’에 속하는 물건 중에서 일정량의 인도를 목적으로 하는 채권을 듯합니다(김준호, 2017). 바꿔 말하면 인도해야 할 물건의 종류와 수량은 정해져 있지만, 그 종류에 속하는 물건 중에서 어떤 것을 인도할 것인지는 아직 특정되지 아니한 채권이라고 하겠습니다(곽윤직·김재형, 2023). 즉, 종류채권에서는 물건 각각의 개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특정한 종류에 해당하는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철수가 영희에게 감귤 1박스를 주문했다고 합시다. 철수는 감귤의 ‘종류’에 속하는 귤이면 어떤 귤이든 1박스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딸기 1박스를 받으면 안 되지요(딸기는 귤과 ‘종류’가 다름). 이런 것이 바로 종류채권입니다. 종류채권은 불특정물채권의 일종입니다.
종류채권 중에는 조금 특이한 종류채권도 있습니다. 철수가 귤을 주문했는데, 귤 판매자인 영희의 냉장고 안에 든 귤 중 10개를 꼭 달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영희는 아무 귤이나 주어서는 안 되고 자기 냉장고에 있는 귤 중 10개를 철수에게 팔아야 합니다. 영희의 냉장고 안에 귤이 100개 있다면, 그 100개 중에 어떤 10개를 고를지는 영희의 자유겠지만 적어도 영희의 선택은 냉장고 안 귤 100개로 제한됩니다. 그래서 이처럼 ‘종류’의 기준 외에도 다른 기준을 두어 제한이 가해지는 종류채권을 제한종류채권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보면 종류채권이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생각치 못한 영역에서 종류채권으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대법원은 “甲이 乙에게서 丙 주식회사 주식을 매수한 후 乙에게 명의신탁하였는데, 丙 회사 주식이 제3자에게 매도된 후 甲이 명의신탁을 해지한 사안에서, 乙의 甲에 대한 주식반환의무는 종류채무에 해당하므로, 乙 보유 주식이 제3자에게 매도되어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정만으로는 乙의 주식반환의무가 이행불능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본 예가 있습니다(대법원 2015. 2. 26. 선고 2014다37040 판결). 명의신탁이니 이행불능이니 하는 것까지 지금 이해하실 필요는 없고, 주식을 돌려줄 의무가 종류채무에 해당된다고 판시했다는 점에 주목하시면 됩니다. 여하튼, 우리 일상에서 종류채권은 참 흔하다는 겁니다.
이제 제375조제1항을 봅시다. 채권의 목적을 종류로만 지정한 경우, 품질을 명확히 정하기 어려운 때에는 채무자는 중등품질의 물건으로 이행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철수가 영희에게 귤 1박스를 주문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철수는 영희에게 어떤 품질의 귤을 줄 것인지는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습니다. 철수와 영희 간의 매매계약(법률행위)이나 철수와 영희 간의 대화 등 어떤 것을 보아도 품질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가정합시다(여기서는 귤 거래에서의 관습 같은 것도 일단 무시하도록 합시다).
그럼 영희는 어떤 품질을 귤을 철수에게 주어야 할까요? 다 썩어가는 귤? 아니면 너무 고급이어서 영희가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할 정도의 상급 귤? 제375조제1항에 따르면, 중등 품질이면 됩니다. 상·중·하에서 중급에 해당하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급’이라는 것은 거래상의 일반적인 관념에 따라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고(배용준, 2020), 칼같이 딱 떨어지는 개념은 아닙니다. 다만, 영희가 누가 봐도 썩어가는(하급) 귤 1박스를 철수에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만약 썩은 귤 1박스를 보냈을 경우, 철수는 하자 있는 귤의 수령을 거부하고 최소 중등 품질은 되는 귤을 다시 보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제581조제2항). 아니면 썩은 귤을 받는 대신 계약해제나 손해배상 등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제581조제1항). 담보책임이나 계약해제, 손해배상청구 등의 문제는 나중에 공부할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그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마무리하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제581조(종류매매와 매도인의 담보책임) ①매매의 목적물을 종류로 지정한 경우에도 그 후 특정된 목적물에 하자가 있는 때에는 전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②전항의 경우에 매수인은 계약의 해제 또는 손해배상의 청구를 하지 아니하고 하자없는 물건을 청구할 수 있다.
제2항을 보겠습니다. 제1항에 따라 중등품질로 물건을 제공하여, 채무자가 이행에 필요한 행위를 완료하거나 채권자의 동의를 얻어 이행할 물건을 지정한 경우에는 그 때부터 ‘그 물건’을 채권의 목적물로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철수는 영희에게 귤 1박스를 주문하였는데, 이것은 종류채권입니다. 영희는 중등 품질의 귤을 모아서 1박스를 만든 철수의 집 앞에 가져다 두고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철수는 마침 샤워 중이었기 때문에, 문 밖에 귤 박스를 두고 가면 자기가 나중에 챙기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영희는 그 말을 듣고 알겠다고 한 후 집으로 돌아갔지요. 그런데, 철수의 생각보다 샤워가 늦게 끝났고, 그 사이에 길 가던 고양이가 귤 박스를 뜯어서 2개를 먹어치워 버렸다고 합시다.
귀여운 냥이니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철수는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철수가 영희에게, 나머지 귤 2개를 다른 종류물로 채워 넣도록 요구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희는 채무의 “이행에 필요한 행위”를 완료하였고, 제375조제2항에 따라 그 순간 영희가 놔둔 귤 1박스는 특정되어 특정물채권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때부터 그 물건을 채권의 목적물로 한다”라는 말의 뜻입니다.
만약 종류채권이라면, 같은 종류의 대체할 물건이 세상에 널려 있으므로 철수는 어디서 구하건 귤을 구해서 가져오라고 큰소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종류채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정물채권으로 전환되었다면, 채권의 목적물이 되는 귤은 ‘특정된’ 귤이기 때문에 영희는 세상 어디 가서도 “철수 집 앞에 1월 1일 오후 3시에 놓여 있었던 귤”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특정물은 어디 가서도 못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수가 영희 보고 구해 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영희가 철수의 집 앞으로 귤 1박스를 가지고 가던 도중, 길고양이가 귤 박스를 뜯어서 귤 2개를 빼먹었다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영희는 아직 이행에 필요한 행위를 완료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수가 영희에게 갖고 있는 채권은 여전히 종류채권입니다. 따라서 영희는 같은 종류에 속하는 물건(중등품질의 귤)을 어떻게든 구해서 1박스를 채운 후 철수에게 가져다주어야 채무를 이행하는 것이 됩니다.
계약서에 명확히 채무 이행 방법이 적혀 있으면 상관없지만, 계약 등에 명시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면 제375조에 따르면 됩니다. 채무의 이행에 필요한 행위가 완료되었는지, 아니면 채권자의 동의에 따라 이행할 물건이 정해졌는지에 따라 특정물채권으로 전환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귤 박스의 배송과 같이 채권자(철수)의 현 주소에서 이루어지는 채무의 경우(이러한 채무를 지참채무라고 합니다), 귤이 채권자의 주소에 도착하여 채권자가 언제든지 수령할 수 있는 상태에 놓였다면, 현실적으로 특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규정을 두고 있는 걸까요? 제375조제2항은 종류채무에 있어서 특정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채무자가 지는 조달의무의 부담을 덜어주고 급부위험을 채권자에게 이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배용준, 2020;127면). 즉, 위의 사례에서처럼 영희가 부당하게 덤터기(?)를 쓰지 않도록 방지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종류채권과 종류채권의 특정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내일은 금전채권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곽윤직·김재형, 「채권총론(제7판)」, 박영사, 2023, 31-32면.
김준호, 「민법강의(제23판)」, 법문사, 2017, 964면.
김용덕 편집대표, 「주석민법 채권총칙1(제5판)」, 한국사법행정학회, 2020, 123면(배용준).송덕수, 「채권법총론(제5판)」, 박영사, 2020, 56면.
2024.2.29.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