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별 Jun 21. 2023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그것은 바로 '사진첩 폴더'


지난 사진들을 보면 좋았던 기억들이 오히려 날 더 아프게 할까 봐. 차마 열지 못했던 사진첩을 열어버렸다.


사진 보기를 돌같이 하자고 굳게 다짐하며, 10년 동안 쓰던 아이폰을 버리고 새로운 폰으로 갈아타기도 했다. 노트북에 저장된 엄청난 사진들을 차마 한 번에 삭제하지는 못하겠고, 골라서 지우려니 그건 더 힘들 것 같아서 아예 사진첩 폴더를 건드리지도 않았었다. 그동안엔 이런 의도적 회피가 그래도 나의 정신건강엔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노트북 하드 드라이브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2주 단위로 갱신되는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자료들이 엄청나게 노트북에 쌓여갔는데, 이건 지워도 지워도 그때뿐이었다. 항상 하드 드라이브의 용량은 간당간당했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엔 저장 용량이 500MB 정도밖에 남질 않더니 노트북 돌아가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고 자주 에러가 났다.


아뿔싸, 올 것이 온 것이다.

일단 지울 수 있는 한글 파일이며, 공부용 자료들을 모조리 지웠다. 그랬는데도 모자란 용량이 늘어나지 않고, 개미 눈곱만큼만 늘어났다.


그래서, 나는 결국 사진첩을 들춰보고야 말았다.


사진들은 거기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지난 추억들이, 박제된 기억들이,

사진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웃고 있는 사진들이 많구나.

그와 함께 갔던 곳, 그날의 풍경과 그날 했던 말이나 행동들도 되살아났다. 그러다가 무심코 짧은 동영상을 하나 클릭했다. 그러자 사진보다 강렬하게 그날의 기억이 되돌아왔다.


우린 웃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고, 함께였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20초가량 되는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이상하게 많이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억눌려 있었던 감정들이 판도라의 상자에서 해방된 듯 좀 더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사실 요즘은 그의 얼굴도 점점 희미하다.

사람의 뇌로 기억해 내는 데엔 한계가 있다.


동영상을 보니 반가운 마음도 들고,

'맞아, 너는 그때 이렇게 웃었었지.'

'그때의 우리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담담했다.


판도라의 상자엔, 행복, 추억, 제주, 사랑, 결혼, 그때의 나와 우리. 찬란했던 지난 한 시절, 3년 치의 기억이 들어있었다.


가장 많은 용량을 차지하고 있는 웨딩사진 폴더에서 사진 두 장과 열어본 동영상을 폰으로 옮기고,

과감하게 Delete 버튼을 눌렀다.

노트북 용량이 7GB 늘어났다.


저 사진들은 따로 보관이 되어 있는데도 그간 지우질 못했었다.(원래, 사진을 잘 못 지우는, 알고 보면, 정말 속정 깊은 타입...)


안녕. 잘 가.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꺼내볼게.

그걸 붙들고 지난 추억에 연연하진 않을게.


하지만, 가끔은 상기하고

좋은 추억을 꺼내 보며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다행히 남게 된 게 '희망'이라고 한다.


비슷한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모든 것들이 빠져나온 공간에

새로운 희망이 남아있다고.


나는, 추억에만 빠져있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날을 조금 더 희망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새로움

희망

긍정


삶은 이어진다.

나는 새로운 키워드를 꺼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