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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aD Dec 28. 2021

물놀이 좋아하는 30대 멸치녀의 라이프가드 후기

늙어감에 대하여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21년도 4차 인명구조요원(라이프가드) 자격증 교육 및 검정 후기는 사실은 <늙어감에 대하여>라는 이야기다.


혹시 진짜 '라이프가드 후기'를 찾고 있다면 구글에 다시 검색해보는 걸 추천한다. 미리 연습해가면 좋을 영법, 일자별 후기, 검정 날 당일 후기, 필기 기출문제 등등 정보가 많다. 나는 '두려움'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려 한다.




1. 교육이 끝나갈 때쯤,

한 강사님이 "라이프가드 수업 듣는다고 진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기가 물에 대해 뭘 무서워하는지 알 수 있다." 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수영 잘한다며 깝죽대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이다.

나는 깊은 물을 무서워한다. 나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고, 힘들면 언제든 멈춰 설 수 있었다. 가끔 바다나 계곡에서 놀 때는 서핑보드나 튜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 속에서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무섭다는 걸 모르고 살았다. 

라이프가드 수업은 5m 깊이의 다이빙풀에서 진행됐다. 떠있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몸이 계속 가라앉았다. 그동안 나에게 헤엄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지, 물에 떠있기 위한 게 아니었다. 하루 6시간, 코와 입을 물 밖으로 내놓기 위해 아등바등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덕분에 내가 깊은 물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이빙 풀 반대쪽에서는 종종 싱크로나이즈 수업을 했는데, 물속에서 bgm을 같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2. 깊은 물보다 차가운 물이 문제였을 수 있다.

"전방 익수자(물에 빠진 사람) 발견!!!"을 쩌렁쩌렁 외친 다음, 용감무쌍하게 물에 뛰어들어(입수법) 빠르게 다가가서(접근영법) 익수자를 데리고(구조법) 물밖으로 나온다(구조영법). 라이프가드 교육은 이 훈련의 반복이었고, 상황별로 적절한 (방법)들은 달라졌다. 이 말은 내가 교육 내내 계속 찬물에 담갔다 찬 공기에 말렸다를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초겨울 수영장은 물 안도 밖도 추웠다.

들어가기 전에 발가락으로 콕콕 물의 온도를 재 보면, 나도 모르게 '후어우엉'하는 표정이 됐다. 그렇다고 라이프가드 하겠다는 사람이 '아이쿠 추워추워' 하면서 슬그머니 물에 들어갈 순 없었다. 어차피 교육생들은 오와 열 맞춰 차례대로 "전방 익수자 발견!!!"을 외치며 풍덩풍덩 몸을 던지게 돼있다. 

체력이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중에 체온까지 떨어지니 입 안에서 죽음이 느껴졌다.


3. 라이프가드 교육을 신청한 이유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가장 소속감을 느꼈던 조직으로부터의 퇴사를 앞두고, '나의 인생 어디로 가는가'를 고뇌하며 육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몸이 피곤하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유사 철학을 갖고 있던 나는 마침 라이프가드 자격증 수업이 열린 것을 보고 '오, 이것 참 힘들겠는데'라고 생각하며 그 외의 생각은 못한 채 특유의 생각 없음 결단력으로 교육을 신청했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60kg의 사람이 물속에서는 부력으로 인해 4.5kg쯤 된다고 한다. 그래서 라이프가드 시험 항목 중에는 (접근영법으로 25m를 가서 1.5m 정도를 잠수해서) 5kg짜리 바벨을 안고 25m를 구조영법으로 오는 게 있다. 옆구리에 바벨을 끼고 수영을 하면 몸이 계속 꼬르르 가라앉는다. 코로 입으로 왈칵왈칵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내가 명상을 하며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경지에 도달한다. 속세의 잡음과 번뇌가 말끔하게 사라진다. 그 빈 공간을 쌍욕이 채운다. SHIBA INU


4. 날 구해줄 사람은 천지 삐깔이다. - 교육 1일 차 메모

나는 두려움에 대해 배우고 있다. 저릿저릿한 경험 치고는 꽤 값싸게 배우는 것 같다. 25만 원.(라이프가드 교육비) 신체적인 증상들이 다 마음, 공포에서 나온다는 게 신기하다. - 교육 3일 차

스스로에게 이렇게 괴로움을 강제하고 있다니 아마 나중에 뒤돌아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거다. - 교육 5일 차


밤에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커다란 바위가 날 짓누르는 것 같았다. 명상 유튜브 틀어놓고 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특히 수영장 가는 버스 안, 숨을 아무리 들이마시고, 아무리 더 깊이 더 세게 폐 속으로 숨을 쑤셔 넣어도 숨이 찼다. 구글에 심근경색(라이프가드 필기 과목 내용이기도 하다) 검색해봤다. 지금 생각해보니 공황 발작 순한 맛 정도였던 것 같다.


5. 아직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라이프가드 지망생이 있을까 봐 해명하자면,

라이프가드 교육과 시험이 그렇게 빡시진 않다. 그냥 내가 지나가던 <물놀이 좋아하는 30대 멸치녀>였을 뿐이다. 같이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아래 세 가지 중 적어도 하나 이상 해당됐다. 

수영을 잘한다

체력이 좋다

라이프가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왔다

만일 당신도 나처럼 셋 다 아니라면, 적어도 주말반(라이프가드 교육 및 검정은 총 48시간, 6시간*8일간 진행되며, 주중반은 1.5주, 주말반은 4주 코스다. 주말반은 주중에 체력을 재정비할 수 있다)을 신청하거나 자격증을 여름에 따자. 

내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이유는 교육 과정이 파괴적이었다기보다 내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나는 동기들의 젊음 앞에 위축됐다. 


6. 같이 수업을 듣는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이었다.

고딩들도 있었고, 현역 운동선수(수영 선수들도 있었는데, 한 마리의 수중생명체 같았다), 현직 군인, 대부분이 해병대 혹은 공수부대 출신이었고, 다 아니면 최소한 체대생이라도 됐다. 나도 주종목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ㄱ...경영학 성비는 남여 7:3, 멸치족은 거기서도 소수민족이었다. 다들 체격이 좋았다.

그동안 나는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고, 다만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불가능성'보다 '가능성'에 치우친 삶을 살았다. 나보다 10년 치 시간이라는 자산을 더 가진 사람들과 같이 훈련을 받으며 내 처지를 깨달았다. 이제 나에게는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라이프가드는 익수자를 발견하는 즉시 입수하여 빠르게 다가가야 한다. 분명히 다 같이 출발해서 다 같이 힘껏 팔다리를 젓고 있는데, 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 이상하다? 나는 더 이상 빠르게 팔을 저을 수가 없는데? 다리가 '너 이렇게 깝치다 다리 풀린다'라고 신호를 보내온지도 한참 됐는데? 이게 내 최대야. 왜 그들은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일과를 마치고 수영장을 나오면 보이던 풍경. 걸을 힘이 없어서 킥고잉을 탔다.


7. 젊음이 사라지는 걸까, 늙음이 차오르는 걸까?

나는 젊어보기만 했지 아직 늙어본 적이 없어,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사라지는 게 무섭다. 내 주위 사람들과 같이 늙어가다 보니 변화를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너도 참 늙었다'같은 소리나 서로 하고 있다. 처음 보는 10년 젊은 사람들에게서 10년 전 내 모습을 보며, 늙어감에 대해 생각했다.


8. 10년 전에도 5m 다이빙 풀에 와본 적이 있다.

허세, 허풍 그런 허구의 것들이 나를 구성하던 때였다. 무서웠지만 꺄르르 웃어넘기며 5m 바닥을 찍고 올라왔다. 만 서른, 체력이 '받쳐주지'못하고 몸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는 그런 실체 없는 것들이 날 지켜줄 수 없다는 걸 배웠다. 아. Johnna 무섭다.라고 생각하며 두려움이 날 때리는 대로 맞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지켜냈던 나의 조각은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는다'였다. 이걸 마흔에도 지켜낼 수 있을까? 지금 나에게 뼈, 혈관, 지방질처럼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 두렵다. 그게 없는 사람이 나라고? 상상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본질이 달라지는 걸까.


9. "다 할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겁먹지만 말고 같이 해보자"라고 다독여준 강사님이 있었다.

항상 꼴찌였던 나를 따로 불러 매일매일 따뜻한 말을 해 주셨다. 첫날 내가 허우적거리는 걸 보더니 '수영도 못하면서 여길 왜 왔어!!!'라고 윽박지르고, 내 나이를 묻더니 '어이쿠~ 어쩌려고 여길 왔어~'라 걱정하던 분이었다. 첫날에 포기할 줄 알았는데 파들파들 떨면서 계속 나오니 챙겨주기로 하신 것 같다. 

나중에는 당신도 50대 때 라이프가드도 따고 강사 자격증도 땄다며, 체력 관리만 잘하면 나이는 문제 될 것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나이 든다는 게 이렇게 서러운 거다~'라고도 하셨다. 그는 70대 할아버지였다. 휘휘 옷을 벗어던지고 첨벙 찬물에 뛰어들어 우리에게 시범을 보여주는 그는 10년은 젊어 보였다.


내가 교육 과정을 버텨내고 합격까지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따뜻한 말들 덕분이었다. 


10. 30대에게 최상의 투자처는 체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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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자신의 순수함을 내어주고 다른 걸 얻듯, 그래서 순수함이 그의 재산이라면, 노인의 재산은 체력일지도 모른다. 체력은 그저 힘이 아니다. 마음가짐이다. 위축되지 않음이다! 체력이 안된다는 건 내가 가진 걸 다 발휘할 수 없다는 뜻도 되고, 회복 속도가 늦다는 뜻도 됐다. 도대체 왜 너네는 자고 일어나면 완충되는 거냐. 

사실 평소에 운동만 좀 했어도 이렇게 대책 없이 힘들진 않았을 거다. 30대의 재산은 뭘까? 진짜로 금전적인걸지도 모른다. 30대에는 돈으로 '컨디션'까지는 살 수 있는 것 같다. 체력은 살 수 없었다.

교육 3일 차, 나의 늙음을 인정하고 다른 늙음선배들을 따라 해 봤다. 약국에 들러 쌍화탕을 사마셨는데 좀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동거인의 영양제도 한 줌 먹어봤다.


머리털나고 처음 돈 주고 사 먹어본 쌍화탕


11. 이 얘기하려고 이 글을 쓴 건데 서론이 무지하게 길었다.

교육 마지막 날, 차가운 수영장 바닥에 쓰러져 생각해봤다. 미디어에 흔히 보이는 억만장자 할아버지들. 그들이 젊음을 사기 위해 치르지 못할 값이 있을까?

글이 더 길어지는 걸 막기 위해 Time Billionaire에 대한 링크로 대체한다. 1 million 초는 11일이고, 1 billion 초는 31년이라는 얘기로 시작한다. 1 billion 달러를 가진 사람들, 그들의 부와 네트워크가 압도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20대 초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2 billion 초를 가진 자산가들이라고. 지금 당신이 누리고 있는 부를 알아보고 레버리지를 당기라는 내용으로 이해했다.


글이 더 길어지는 걸 막기 위해 새해 인사부터 날린다.

2022년도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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