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보름째에 부르는 샤르가오 예찬가 | 샤르가오 > [한국] > 몬타나
시아르가오 간지는 '무심하게 걸친'이다
식당에 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OO여중 학부모회'라고 쓰인 옷을 입고 있었다. 이후로도 시아르가오에서 종종 한국의 '헌 옷 수거함'에서 꺼내 입었을 법 한 옷들을 만났다. 물론 다들 새삥이었다.
로컬 옷가게에 가면 옷을 무더기로 쌓아두고 판다. '매장 디스플레이'라기보다 방구석 빨래 무덤처럼 생겼다. 무릇 의복이란 '몸을 덮는 천'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시아르가오는 참 편한 곳이다. '무심한 듯'이 아니고 진짜로 무심하다. 표지만 보고 책을 판단할 수가 없다. 모두가 표지에 무심하다. 책 펼쳐들 맛이 난다.
(패피들의 나라 한국에서 나와 나란히 길을 걸어주는 친구들에게 이 서버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 인사를 전한다)
서핑 간지는 맨몸 간지다
몸에 뭘 걸치면 안 된다. 열대(Tropical)의 파도를 탄다면, 남자는 보드숏(반바지) 하나, 여자는 아슬아슬한 비키니 혹은 단벌 수트를 입는다. 구릿빛 아닌 커피빛 피부의 비결이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고 바다에 나간다. 그렇게 해도 약배전, 미디엄 로스팅이다. 긴팔 긴바지에 모자에 신발까지 닥치는 대로 껴입어서 서핑 강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강사들도 위에 래시가드를 입는다. 낡고 해진 래시가드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서 제대로 피부를 보호해 줄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근데 개간지다. 한 번은 서핑하다 보드에 부딪혀서 내 래시가드가 부욱 찢어졌는데, 손바닥만 한 구멍이 났길래 버릴까 했지만 좀 간지 나는 것 같아서 잘 입고 다닌다.
단풍잎과 야자수
시아르가오에는 야자수가 많다. 야자섬(Palm Island)이라는 별명도 있다. 슬랙이라는 협업 툴에서는 '휴가 상태'를 야자수 이모티콘으로 표현한다. 나 또한 야자수 로망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과 부서지는 파도와 코코넛 나무! 현지에서 만난 친구에게 '나 야자수 판타지 있어' 했더니 '나는 가을 잎(Autumn Leaves) 판타지 있어'라고 했다. 단풍? 가을마다 길바닥에 버려지는 그 단풍?
내내 여름뿐인 베짱이들의 후텁지근함과 여유로움이 부러웠는데, 그들은 계절의 변화가 신기한가 보다. 평생 눈을 본 적 없다는 그 친구에게 '한국은 지금 오리 깃털을 넣은 옷을 입고 다닌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데 그걸 입으면 애벌레가 된다'라고 했더니 깔깔 웃었다.
애벌레가 된 지 보름이 지났다. 내 몸을 덮는 천이 많이 달라졌다.
은행과 전당포
다른 나라에 살면 종종 내 상식이 부서진다. 그게 짜릿하다. 환전하러 은행에 갔는데 그런 건 안 해준다고 했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섬에 달랑 하나 있는 은행에서 달러를 안 바꿔준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었더니 건너편 전당포에 가보라고 했다. 전당포에 갔는데 수십 명이 줄을 서있었다. 아까 은행에는 한 명도 없었다. 시아르가오의 경제에 피(돈!)를 공급하는 심장은 은행이 아니라 전당포인가 보다.
전당포 고객은 전부 현지인이었다. 500달러를 현금으로 주기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들 훨씬 큰돈을 건네받고 있었다. 아마 해외 송금(remittance), 외국에서 일하는 가족이 월급을 부쳐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전 세계적으로 해외송금이 수십 조 규모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전통 금융 서비스'로부터 소외된 사람일수록 수수료가 비싸다고 들었는데, 국제결제망(SWIFT)과 전당포가 떼가고 나면 얼마나 남을까 걱정이 됐다.
암호화폐, 가상화폐, 코인, 토큰, 여러 이름을 가진 그 무언가는 결국
인터넷 원주민들의 화폐(internet native currency)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국경이 없다. 내가 한국에 앉아서 미국에 서버가 있는 웹사이트를 열어본다고 해서 이쪽저쪽에서 추가 과금을 하지 않는다. 거래 가능 금액, 시간, 지역 제한이 없고 무엇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시아르가오에 머물며 현지 사람들에게 암호화폐 지갑을 만들어주고 송금하는 방법을 알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 암호화폐 하면 한탕주의, 한 몫 챙기기가 연상되는 건,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서 더 큰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안으로 가고 싶어 하는 문명의 사람들에게 크립토는 애초(2023년)에 쓸모없는 물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필리핀은 칠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개중 작은 섬에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공산품이 귀하다. 시아르가오에 살면서 비로소 내가 쓰던 모든 게 공산품이라는 걸 알게 됐다. 철근과 콘크리트라는 자재가 없어 그런 건물도 없다. 목구조를 뚝딱뚝딱 올린 다음 천장을 쿠킹호일같이 생긴 얇은 철판이나 야자수 이파리로 덮는다. 벽과 문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침투하지 못한 곳곳에 불편함이 서려있다. 일단 디지털 노마드의 밥줄인 인터넷이 잘 안터진다. 전력망부터 불안정하다. 갑자기 전기가 끊기면 물도 안 나온다. (상하수도가 없기 때문에 전기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다 쓴다) 첫 일주일은 정전이며 비포장도로며 생전 처음 겪는 불편에 몸부림쳤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인터넷이 안되니 밤마다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슈웅~ 소리가 나며 불이 꺼지고 모든 기계가 작동을 멈추면 밖으로 나간다. 별은 문명에서 멀어질수록 밝게 보인다. 특히 정전된 섬, 어둠뿐인 땅에서 올려다보는 달은 눈부시다.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쨍하다.
너무 미화한 것 같으니 현실감각을 추가하기 위해 최근 개봉한 아바타2 얘기를 해보자. 약간의 스포가 있으니 안 봤으면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자. 시아르가오 물을 잔뜩 먹고 영화를 보니 새로운 장래 희망이 생겼다. 물 부족이 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만장자를 시켜준대도 나는 물 부족 하고 싶다. 물 부족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뭔가? 고래 타고 놀기. 잠수 하며 친구랑 놀기. 물의 흐름을 느끼기!
하지만 그들이 기계 문명의 침략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순수함이란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천부적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수함을 주고 다른 것들을 산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능력, 말의 속뜻을 읽는 능력,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능력 같은 걸 산다. 시간이 지나며, 혹은 나이가 들며 다들 빈털터리가 된다. 사회는 그 궁핍함을 축복한다. 아직도 순수함을 들고 있는 아이, 혹은 어른이 있다면 그는 루저다.
열두 살 아이의 눈을 가진 나의 서핑 강사는 한 달 같이 지낸 강습생과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울먹이는 표정을 짓는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면 서로에게 없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밖에는 '으' 발음 나는 모음이 잘 없다. 한국에는 애 셋 딸린 중년 남성이 한 달 사귄 친구와 헤어질 때 짓는 울먹이는 표정이 없다.
과학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고체는 열에너지를 흡수해서 액체가 된다고 한다. 흰 눈이 녹아 질척이는 회색 슬러시가 된다니. 그 반짝임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내 '눈 빛'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모두가 일본에 가서 텅 빈 한국에 돌아온 지 어연 보름,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오늘에 만족해버리면 자본주의의 엔진이 멈춰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