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기쁨, 사회적 희망 - 작은 우주의 탄생
내 아이가 태어났다
하나의 인생은 하나의 기적이다. 그리고 하루하루는 모든 삶에 기적같이 주어졌다. 내 아이의 탄생을 처음 지켜보며 든 생각이다. 한 아이를 품에 안으며 한 명의 아빠가 태어났다.
10시 39분, 3.23 kg.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부모가 되는 순간의 느낌은 쉽게 정의할 수 없을 것 같다. 의사가 말해준 시간으로 규정되지 않는 시간이었고, 사회적 규칙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극적인 순간에 나오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노래 따위는 들리지 않았고, 세상에는 오로지 아기의 작디작은 입술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뿐이었다.
우주의 원리를 밝히려는 현대 물리학의 오래된 화두는 초끈 이론이다. 이론에 따르면 우주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원자가 아니라, 만물과 에너지의 근원이 '끈'이라고 한다. 직관적으로 이해 안 되는 조금 이상한 이론이고 과학자들끼리 회의적인 시각도 많지만, 끈이론에는 이상하지만 그럴듯하게 재미있는, 다중우주 개념이 등장한다. 그 어떤 다른 우주에서는 생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끈, 그 파동은 아기의 첫 울음소리일 것이다. 아빠 물리학의 시작이다.
이 날은 엄마 아빠의 통장 비밀번호가 될 아이의 생일이다. 아이가 태어난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낙장불입. 아이의 성장하는 시간들이 곧 내 삶이라는 생각. 자식은 평생 짝사랑해야 하는 존재라는 흔한 말이 조금 이해된다. 아이가 커서 함께 야구장에 가고 캠핑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기대보다 걱정이 더 스몄다. 얼마나 엄마, 아빠와 아기에게 힘든 날이 많이 찾아올까. 아이가 아프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신생아실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는데도 혹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닥치는 어려움은, 출산 후에 찾아오는 산모의 통증이다. 자연분만이어도 해도 출산 전후의 후유증은 힘들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가만 따라가 보면, 죽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말이 맞다. 고통은 개별적이어서, 남들 다 하는 것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든 엄마들은 정말 대단하다. 과거는 사라지고 희미해지만 어떤 삶의 순간들은 선명하다.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세히 알려주지 못한다. 사실 어떤 방식으로도 제대로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는.
생일 축하에 대한 완벽한 이해
나는 생일 파티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어린이였다. 그 시절 가장 정성스러운 글씨로 반으로 접히는 작은 종이에 "내 생일파티에 와죠" 라고 적힌 초대장을 받을 때마다 묻고 싶었다. "와죠 말고 와줘 아닌가?", "너 말고 너희 엄마한테 축하드려야 할 것 같은데?" 이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하던 어린이였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어릴 때와 얼굴도, 생각도 아주 많이 바뀐 아저씨가 되어 사회화는 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었다. 스스로 선택하거나 노력해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축하를 하지 못해 안달인가. 내 힘으로 이룬 성취가 아닌데 말이다. 엄마들이 고생했으니 엄마가 축하와 감사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생일 축하는 안부 인사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품에 안은 순간부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생일은 축하받아야만 한다. 생일이 아니어도, 대단한 걸 이루지 않아도 존중받아야 한다. 모든 존재는 신비롭다. 태어나느라 거친 과정만으로 충분히 대단하다. 세상도 달리 보인다. 동네에 시끄러웠던 아이들은 귀엽게 조잘거리고 있었다. 생일 알람이 뜬 카톡 친구를 보면 이들의 부모님이 가졌을 신비로운 순간의 환희가 느껴졌다. 모두가 너무나 귀하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매일 기적같이 생명이 탄생하고 그 하루들을 우리는 무심코 살아가지만, 이 기적들은 하나하나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 귀하고, 귀하고,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럽다. 살면서 힘든 날도 싫은 순간도 많겠지만,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내 아이도 알게 되면 좋겠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게 해 주었다고 고마워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사춘기가 되면 날 왜 낳았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이쁘지 않을까,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날 왜 낳았냐고 묻지 않는 이 너무 작고 귀여운 생명체의 존재가 너무나 감사할 뿐.
내가 받고 싶었던 좋은 것을 모두 내주고 싶은 존재. 이것은 '친절'의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대하는 것. 그래서 '친절'은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사랑의 방식일 것이다. 우리 아이가 "친절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사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아이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아기에게 건넨 첫마디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인생을 열었을 때, 아빠는 아기에게 말했다.
"빵글아. 반가워. 아빠랑 많이 놀자"
같이 놀자고. 아무도 중년 아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본 기억도 아득하다. 돈 많이 벌자, 부자 되자, 성공하자. 이런 말들이 더 익숙한, 세파에 찌든 흔한 아빠. 어쨌든, 아이와는 '최고의 것'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바로 '노는 것'. 공부 잘 하자. 돈 잘 벌자는 말 대신, 아들에게 처음 한 말이 많이 놀자고 한 것이 스스로 꽤나 흡족하다.
사랑은 결국,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다. 성인들에게 인류에게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을 때 사랑이라고 답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다 세상 모든 것들 다 빼면 사랑 하나 남는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동사라고 한다.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같이 노는 것이 최고의 사랑 방식일지 모르겠다.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고, 아이와 잘 놀아주는 것은 곧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고, 사랑받았다고 느끼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육아의 고됨에 취해 첫 마음 잃지 말자며 다시 되뇌어 본다.
"아가야 아빠랑 많이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