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하지 않아도 내 삶이다
"낙오자 한 명 더 탔습니다"
마라톤 포기자들을 운송하는 버스 안이었다. 알바하는 여학생이 전화를 들어 관리자에게 보고하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지쳤지만 또렸하려 애쓰던 목소리. 버스 안 많은 낙오자들 숫자를 보고하며 버스를 타고 내리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낙오자'라는 말을 직접 나에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되어 일찌감치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고, 나보다 더 먼 거리를 달리다 지친 이가 레이스를 포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미 그런 단어, '낙오자'라는 말로 불렸으리라. 어쩌면 지금 버스에 오른 저들보다 먼저 레이스를 포기한 더 나약한 포기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을 테니.
낙오자 버스는 도심 속 마라톤 교통 통제가 풀릴 즈음 활동을 시작한다. 출발하고 다섯 시간 정도가 지날 때쯤이다. 완주하기 힘든 길 위의 러너들을 데려간다. 데려갈 때쯤 되면 러너가 아니고 워커들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낙오하는 사람들은, 버스가 다닐 시간 즈음이면 은근히 완주 포기를 종용하는 버스를 기다리기도 한다. 달리기 전 짐을 출발지점에 다 두고 왔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으니 구원의 손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낙오자는 있게 마련이고, 생각보다 많아서, 함께 버스를 타고 보면 완주 실패도 더 이상 쪽팔린 게 아니다.
그렇게 몇 년 전 참가한 서울 도심을 달리는 풀코스 마라톤에서, 반도 안 되는 20km를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발목과 무릎 부상을 안고 첫 실패를 경험했다. 낙오자 버스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당시 내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분석과 기록의 잣대를 들이대 상처를 내기에는 받을 상처가 두려워 차마 실패를 평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황학동 노인처럼 왕년에 내가 말이야라고 자랑할 시점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이미 풀코스도 몇 번 완주했고, 당일치기로 지리산을 종주했고, 사막 마라톤 250km을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달려봤는데, 그때와 나는 이미 다른 몸, 다른 존재였다. 열심히 달리던 시절 이후로 운동을 한동안 하지 못했고, 살이 많이 쪘었다. 완전히 엔진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그런대도 옛 추억에 신청했던 무모했던 풀코스 도전.
낙오자 버스에서 내려,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완주하면 주는 메달, 빵과 우유 봉지를 완주한 척 받아왔다. 펼쳐놓고 앉아서 조금 쉴 수도 있었지만 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완주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 사이로 무안하게 완주 메달을 받고 걸어 나왔다. 풀코스의 절반 정도를 내 힘으로 달려왔지만 그 나머지를 포기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웠다. 최대의 마라톤 축제였지만 다행히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외로웠지만 그게 다행이라 여겼다.
다 아는 전쟁에서 패하다
낙오자가 된 것은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다. 나는 완주 실패의 기분을 몰랐다. 완주를 포기하거나 다쳐서 기권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꼈던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그저 운이 좋아서, 모든 조건들이 우연히 잘 맞아떨어져서 성공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분석한 실패 원인은 체중조절 실패와 출발 전 스트레칭 부족, 긴장감 결여였다. 몸무게를 많이 줄이고 갔어야 했고, 조금 쌀쌀했어도 출발 전에 다른 선수들따라 몸을 좀 풀어줬어야 했고, 그래도 풀코스였는데 아침운동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 다 아는 전쟁에서 패했다.
낙오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실패자들은 외부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러면서도 무너지는 자존심도 지켜내야 한다. 나는 나름대로 치열했는데,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낙오자를 위한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실패를 머릿속에서 받아들이는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자존감의 파괴도 동반한다.
완주하지 않아도 내 삶이다.
세바시 강연에서 풀코스 마라톤, 버스를 무시하고 달린 외로운 러너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자신의 이야기인데, 나처럼 낙오자 버스를 타지 않고 끝까지 달린 이 분은 마라톤 운영팀이 퇴근한 탓에 메달도 결승선도 없는 완주를 했지만 결국 완주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멋진 말로 강연을 마무리하신다.
여러분만의 산을 만들고 그 산의 주인이 되십시오.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날 여러분들을 하나의 브랜드로 기억해주는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원하는 바를 끝까지 이루셔서 원하는 개인 브랜드 이루시기 바랍니다.
-신병철 스핑클 대표, 「세바시 398회」 "개인 브랜드, 당신의 이름을 알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내가 완주를 했더라도, 하지 못했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세상도, 나도 그랬다. 끝까지 완주했더라면 이렇게 강연의 훌륭한 소재 거리도 되고, 뿌듯함도 남았겠지만 멈춤을 선택했던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낙오의 추억은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생각보다 운이 많이 작용했다.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자랑하고 싶었던, 그 허영의 무너짐이 낙오자 버스에서의 허탈감을 설명할 수 있다.
-완주했던 추억 속에서, 그때 내가 정말 멋있었다고 나를 더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다.
-좋은 게 좋은 줄 몰랐던 그때, 그리워하는 시절이 쌓여 자존감이 된다.
-너는 내가 아니다.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을 일을 너무 쉽게 재단하지 말자.
돌이켜 보면, 대회 운영을 위해 일했던 알바 학생 이외에는 나를 낙오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더는 없었고, 외부의 시선도 딱히 없었다. 내게 손가락질할 것 같은 많은 사람들도 실은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것이다. 무너진 자존감은 금방 회복되었다. 실제로 파괴되지도 않았으니까. 파괴된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실제로 파괴되지 않았다고 믿는 편이 나았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그 마라톤을 포기하기 직전에는, 길을 걸으며 산책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걷기 대회처럼. 나와 비슷한 페이스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걸으며 뛰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처럼 사진 찍고 즐기는 여유조차 내게는 없었다. 그 친구들도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왔지만 남은 추억은 다를 것이다. 같은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는 삶의 축제에서 한바탕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는 아무도 관심 없는 드라마 속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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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만드는 100일 기념일, 6일 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