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항상 3주 입원항암+1주 항암방학이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2주 방학을 가져봤다. 이렇게 오래 퇴원해 본 적은 없어서 1주일이 지나니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식하러 들어가면 5주 입원예정이기에 (1주 일반병실-3주 무균실-1주 일반병실) 불안해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퇴원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게 뮤지컬 ‘위키드’ 보러 영화관에 가는 거였다. 마침 친구가 48명만 들어갈 수 있는 영화관 티켓을 선물로 주어서 감염 걱정 덜 하면서 위키드를 볼 수 있었다.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마음이 고단해질 때마다 학교에서 타임스퀘어까지 걸어가서 매표소에서 가장 싼 티켓을 사서 뮤지컬을 봤었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지곤 했었다. 아프고 나선 올해 3월부터 극장에 가지 못했으니 이렇게 공연을 오래 안 본 것도, 이렇게 오래 대본을 안 쓴 것도 10년 만이다. 그래서 위키드를 보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좋아하는 공연을 다시 볼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냥 뮤지컬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원인이 없다 했지만,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래” 였었다. 그런 말을 들을 만큼 진짜 열심히 글을 썼고, 참여하지 않았던 공모전이 거의 없었다. 아주 작은 기회도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잡았고, 코로나로 공연이 엎어졌을 땐 다큐멘터리 작가를 하면서 어떻게든 글을 썼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억지로 일을 멈추고 나니 느껴지는 건... 난 그저 뮤지컬을 쓰는 게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2년 반을 백수로 지냈다. 매일매일 열심히 글을 썼지만 매번 “글이 너무 착하고 자극적이지 않다” “트렌드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어떤 프로듀서분은 나는 고생을 안 해봤기에 절대 작가로 성공할 수 없다는 말도 하셨다. 그런 말을 듣고 울면서도 또 글을 썼다. 그만큼 글 쓰는 게 좋았고, 공연이 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알기에 의뢰가 들어왔을 때 거절하지 못했다. 가끔 브레이크가 없는 차를 타고 질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끝나지 않는 데드라인들로 숨이 막히고,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받아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소장출혈로 입원을 한 상태에서도 노트북을 놓지 못했다. 곧 올라가는 공연을 수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암 진단을 받고 항암을 시작하면서 마침내 노트북을 덮었다. 그렇게 대본도 쓰지 않고 공연도 보지 않으며 6개월을 보냈다. 그러고 영화관에서 위키드를 보니 참아왔던 그리움이 몰려왔다. 뮤지컬이 여전히 참 좋았고, 나는 아직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걸 느꼈다.
처음 예후가 안 좋단 얘기 들었을 때 ‘그래도 공연 많이 올려서 다행이다. 만약 이대로 내 생이 끝난다 해도 아쉽지 않아 ‘ 란 생각을 했었는데, 두려움 앞에서 떨었던 허세였던 거 같다. 꼭 오래오래 살아서 오래오래 글을 쓰고 싶다. 예전처럼 많이 쓰지는 못하겠지만, 대신 오래오래 따뜻하고 작은 이야기들을 쓰고 싶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내일 다시 입원을 한다. 내 인생 마지막 항암치료를 할 것이고,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통해 나는 완전히 건강해질 것이다. 사실 많이 무섭다. 항암은 차수가 쌓이면서 몸은 힘들었어도 이제 패턴을 알기에 마음은 덜 두려웠는데, 조혈모세포이식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기에 1차 항암 하기 전처럼 두렵다. 입원하면 하게 될 히크만 시술부터 너무 무섭다. 케모포트 시술 때처럼 또다시 차갑고 무서운 시술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겠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케모포트는 치료의 시작이었지만 히크만은 치료의 끝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울더라도 씩씩하게 시술받아야지. 고통은 잠시뿐이지만 사랑은 영원하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내가 사랑하는 일을 생각하며 내 인생 마지막이 될 입원을 하려고 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길었던 여정의 끝이 보인다. 빛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