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모포트 영원히 안녕! 히크만 안녕!
이식을 위해 입원을 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나는 만나는 분마다 ”마지막 입원이에요! “라고 외쳤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긴 머리의 내가 암이란 걸 받아들이지 못해 엉엉 우는 모습부터 소장절제수술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모습, 머리를 민 모습,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위액만 계속 토하던 모습까지 다 보셨던 분들이다. 다들 ”이식 파이팅! “이라고 외쳐주시며 나의 마지막 입원을 응원해 주셨다.
케모포트는 조혈모세포채집을 하기엔 관이 얇아서 관이 두꺼운 히크만을 케모포트가 있던 자리에 삽입해야 한다. 그리하여 6개월 동안 내 가슴에 심어져 있던 케모포트는 내일 제거될 예정이라 팔에 링거를 연결할 바늘을 꽂아야 한다.
혈관이 워낙 약해 바늘에 찔릴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도 고생하시고 나도 고생한다. 그래서 이전 병원에선 결국 손등이랑 발등에 바늘을 꽂았는데 너무 아파서 서러웠었다. 6월에 케모포트를 심고 나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났는데 오랜만에 팔에 두꺼운 바늘이 찔린다. 1차 시도가 실패되자 간호사 선생님이 아무래도 손등에 해야겠다고 말하셨는데 예전의 고통들이 떠오르면서 공포 때문에 몸이 떨렸다. 그런 나를 보고선 간호사 선생님은 그럼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하시며 이번에 실패하면 그땐 손등에 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행히도 2차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그렇게 손등과 발등을 지켜낼 수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있을 조혈모세포 채집을 위해 오늘부터 촉진제를 하루에 2대씩 맞는다. 호중구가 1000 이하로 떨어질 때마다 맞던 그 촉진제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주사라 너무 싫어하는 주사이다. 조혈모세포 채집이 끝날 때까지 하루에 두 대씩 맞는다고 하니 채집이 부디 하루 만에 끝나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하루 만에 채집이 끝나는 경우는 한 달에 한 명 꼴로 나올 만큼 많지 않다고 하니 기대를 하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100명도 안 걸린 희귀암에 걸린 확률에 비하면 한 달에 한 명이면 꽤 높은 확률이니까 그 안에 내가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해본다. 아니면 뭐 어쩔 수 없지. 아픈 주사 더 맞을 수밖에.
다음 날, 아침 9시부터 케모포트를 제거하고 히크만을 삽입하러 가게 됐다. 지혈 때문에 침대로 이동해야 한다 해서 굉장히 오랜만에 침대를 타고 이동했다. 2차 항암 때 마지막으로 침대로 이동하고 그 이후엔 휠체어, 그 이후엔 두 발로 검사를 받으러 다녔으니 굉장히 오랜만에 타는 침대이다.
6개월 전, 케모포트를 심었던 곳에 도착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기에 기억이 생생하다. 생일이라고 마취 많이 해달라고 했는데 오히려 마취가 너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시술실 앞에서 엄마랑 인사를 하고 시술실 문이 닫히는데 바보같이 눈물이 났다. 이게 뭐라고 우는 나도 참...
혼자서 배낭을 메고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너 참 겁 없다.” 란 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남미 여행을 할 때 뉴욕-리마 왕복항공권만 끊고선 아무것도 예약 안 하고 떠나면서도 마냥 신나기만 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고 나니 세상 이런 겁쟁이가 없다. 주사 맞는 것도 무섭고, 저 차가운 시술대에 또 눕는 것도 무섭다. ‘소장도 절제했는데 이것쯤이야!’ ‘독한 항암도 이겨냈는데 이것쯤이야!’라고 마인드 컨트롤하며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 이름이 불렸다.
그렇게 6개월 만에 다시 시술대에 누웠다. 내 기억엔 쇠로 된 차가운 시술대였던 거 같은데 이번엔 매트가 깔려있어서 누워있을 만했다. 시술해 주시는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내 얼굴에 파란 천을 덮고선 마취가 시작됐다. 마취 바늘이 너무 아파 비명이 터져 나왔는데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을 찌르셨다.
선생님께선 케모포트는 제거됐다고 하시며 이제 히크만 삽입할 건데 관이 두꺼워서 불편한 느낌이 들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 무언가를 내 살 안에 욱여넣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 욱여넣는 기분이 들더니 스테이플러로 찝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었는데 히크만을 고정해야 해서 마취 한번 더 한다고 하시곤 아픈 마취주사를 또 찌르시고선 히크만 관을 내 살에 꿰매셨다.
선생님은 끝났다는 말과 함께 내 얼굴에 덮인 천을 걷으셨고, 눈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아주셨다. 나는 혹시 케모포트를 볼 수 있냐고 물었다. 6개월 동안 내 가슴속에 있었던 애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피 묻은 케모포트를 들어 올렸고, 하얀 눈알처럼 생긴 케모포트가 나를 바라봤다.
케모포트 심을 때 내가 정말 암환자가 됐단 생각에 서러웠는데, 케모포트 덕분에 바늘에 안 찔리고, 혈관통 느끼지 않고 항암 6차까지 잘할 수 있었다. 어떤 분들은 중간에 염증 때문에 케모포트를 제거하고 재시술하셨다는데, 감사하게도 그런 이벤트 없이 6개월간 잘 사용했다. 그동안 고마웠고 이제 다신 만나지 말자! 영원히 안녕 케모포트!
시술실에서 나와 히크만이 잘 심어졌는지 엑스레이를 찍고선 내 병실로 돌아왔다. 히크만은 케모포트와는 달리 밖으로 관이 나와있어서 어떻게 생겼나 보려고 고개를 내렸더니 지혈이 안 돼서 환자복이 피에 젖어있었다. 놀란 엄마가 간호사 선생님을 호출했고, 선생님이 소독을 하시곤 모래주머니를 올려주셨다.
히크만을 넣은 자리가 아직도 욱신욱신 거린다. 마치 케모포트 처음 심었을 때처럼 움직일 때마다 아프다. 하지만 안다. 이 아픔과 불편함에 곧 익숙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한 몸처럼 느껴질 때쯤 제거한다는 것을. 히크만은 퇴원할 때 제거한다고 하니 이제 5주 남았다. 히크만에게 영원히 안녕을 고할 때까지 치료 잘 받아야지. 난 겁쟁이지만 그래도 겁 난다고 도망치지 않고 벌벌 떨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겁쟁이니까.
이제 이식을 위한 첫 번째 단계를 클리어했다. 다음은 이식 전 검사들과 채집이다. 한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