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좀 게으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상당히 싫어합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제 이런 성격으로 인해 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아이 키우면서 다른 엄마들도 비슷하게 겪는 일이긴 합니다. 바로 늘어나는 잔소리. 사실 “잔소리”는 엄마 입장에서 공평한 단어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특정 행동을 요구하는 엄마의 의사표현이니까요. 오히려 해야 할 행동을 자꾸 지연하는 측이 문제인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외투를 벗어서 정리해두고, 손을 씻어야겠죠.
“외투 정리하자.”
“손 씻자.”
어린이집에 가는 동안 잠시 이별했던 장난감들과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격렬하게 놀이에 열중하고 나면 거실이며 방에는 창조 전의 혼돈이 임합니다. 혼돈 속에서 저녁을 차려내고 아이들과 식사 시간을 가지려면 엄마 목소리가 다시 커집니다.
“애들아, 장난감 정리하고 밥 먹자.”
정리하자는 말 한 번에 혼돈이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에 가깝습니다.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식탁에 앉게 되죠.
콩이 싫다는 둘째에게는,
“반찬투정 하지 않아요. 골고루 먹자.”
밥 먹고 나면 밥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는 일에서 밥 먹고 나서 실내복으로 갈아입기, 씻고 양치하기, 필요에 따라 치실질하기, 화장실 다녀오기, 자기 전 읽을 책 가져오기 등등.
하루의 일상이 실행되기 위해서 엄마가 요구해야 하는 ‘말’은 참 많습니다. 한 번에 바로바로 실행되는 경우가 없다 보니 듣는 쪽에서는 잔소리가 됩니다.
같은 말 여러 번 하는 걸 싫어하는 저로서는 이 일상이 참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제가 아이들에게 요구할 일이 더 많아졌죠. 어렸을 때는 가르쳐 주면서 제가 해주는 부분이 많았다면 이제 아이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니까요.
“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행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했습니다. 청유형 요구를 질문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씻고 양치질하고 잠옷 갈아입자.” 대신 질문했습니다.
“잘 시간이네. 잠잘 준비 하자. 무엇을 해야 할까?”
질문 한 문장으로, 날마다 반복되던 청유형 요구사항 4~5개가 줄어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습니다. 사실 엄마가 잔소리하는 일상의 요구사항을 아이들이 몰라서 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잔소리 대신 질문했을 때 아이들은 무엇을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지 않았습니다. 놀랍도록 차분하게 자신들이 할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 배신감이 들 정도로요.
‘다 알면서 안 한 거였군….’
사람은 질문을 받으면 생각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생각해야, 변할 수 있습니다.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시나 충고는 변화를 끌어내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즐거운 영혼”이라고 부르는 둘째는 엄살이 좀 심한 편입니다. 외할머니 따라 시골마당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더니 신발에 가시가 들어갔나 봅니다. 그 가시가 마침 엄지발가락 끝에 박히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발을 바닥에 딛지 못해 절뚝거리며 아프다고 목놓아 웁니다. 간신히 가시의 존재를 확인하니 다행히 깊이 박히지 않아서 족집게로도 뽑을 만했습니다. 문제는 둘째가 발을 내주지 않는 겁니다.
“명아, 잠깐이면 돼. 찌르거나 하는 거 아니야. 봐봐. 족집게지. 그냥 가시 끝을 잡아서 쏙 빼는 거야. 명이는 가만히만 있으면 돼. 엄마가 발을 잡아야 가시를 빼지. 자, 발 내밀어 보자. 하나도 안아파. 어디 손에 족집게 대보자. 안아프잖아.”
엄마의 진심 어린 숱한 설득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예리하게 느껴지는 발가락 끝에 박힌 가시와 차갑고 날카로운 족집게가 합쳐져서 발끝의 통증보다 더 큰 두려움이 아이를 짖누르고 있었으니까요. 참, 우리 집 막내 둘째는 한 고집 한답니다. 한 고집에 한 엄살이 고명으로 뿌려지면 그 결과는 다들 예상하시죠? 매우 소란한 장기전입니다.
족집게를 아이 발에 대보지도 못한 채 한참이 지나고 작전을 바꿨습니다. 억지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어찌 발에 족집게를 댄다 해도 아이가 두려움에 자지러지며 울면 머리카락보다 얇은 가시를 빼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요. 설득대신 질문했습니다.
“가시를 뽑지 않으면 계속 아플 텐데, 괜찮아?”
“불편할 텐데 걸을 수 있겠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하는 말, “엄마가 업어주면 되지!”
애들도 누울자리 보고 다리 뻗는 법이죠. 나름 생각한 대책이 있더군요.
“그래도 직접 못 걸으면 형이랑 노는 것도 불편할 텐데? 또 지금 안 뽑으면 상처가 곪아서 병원에 가서 메스로 째고 가시를 빼야 하는데, 그럼 더 아플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둘째 안의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생각해봐. 아까 족집게 하나도 안 아팠지? 계속 아프면서 걷지도 못하고 상처를 키워서 병원에 갈지, 아니면 잠깐 눈 꼭 감고 가시를 뺄지. 어느 게 더 나은 선택인지 판단해봐.”
역시 한 고집 하는 둘째는 괜찮다며 치료의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가 사촌누나와 놀던 명이가 생각을 바꾸고 엄마를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놀랄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노는데 불편했던 거지요. 걸을 수도 없고 언듯언듯 발을 디디면 자지러지게 아프니 말입니다. 엄마의 온갖 설득에도 꿋꿋하게 버틴 엄살쟁이 둘째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단 내리는 걸 보며 아이들이 스스로 사고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서러움을 울음으로 터트리며 그럽니다.
“앙앙! 엄마, 가시 빼주세요. 대신 안 아프게 해야 해.”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통곡하는 아이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꼭 안아주며 달래주었습니다.
“당연하지 명아, 엄마가 쏙 하고 뽑아줄 거야. 명이가 도와줘야 엄마가 할 수 있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지?”
눈물이 그렁그렁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둘째의 엄지발가락 끝에서 새까만 가시가 뽑혔습니다.
아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잠깐 참고 가시를 뽑는 게 더 나은 일이라는 판단을 내린 둘째가 대견해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결국, 변화는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였습니다. 지시나 충고는 잠깐 효과가 있어 보이는 외부 자극이 될 수는 있어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으니까요. 생각해서 판단을 내려야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라는 정신적 과정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질문할 때 자극이 생깁니다. 스스로 이 질문의 공을 쏘아올릴 수 있다면 매우 훌륭합니다. 혹은 질문하는 훈련을 통해 질문 본능의 날을 벼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엄살쟁이 둘째가 잠깐 아파도 참고 가시를 빼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내린 날, 엄마는 다짐했습니다.
“질문의 날을 바짝 세우자. 지시나 요구가 아니라 아이들의 사고력을 키워주는 질문으로 일상을 채우자. 스스로 사고해 필요한 변화를 선택하는 자율형 인간! 멋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