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영 Apr 20. 2020

질문학교 입학 환영

우리들의 질문 자아상

질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질문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질문하기란, 정말 누워서 떡 먹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누워서 인절미 드셔보신 적 있나요? 입에 떡을 제대로 가져가는 일은 차치하고, 떨어지는 콩고물에 눈도 제대로 못 뜬답니다. 앉아서 먹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죠. 


아이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냥 다짐이 아니라, 질문에 목숨을 걸겠다는 배수진의 각오였습니다. 질문 던지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나더군요. 질문하기가 괜히 어려운 건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질문은 본질상 내 무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뭔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걸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셈이지요. 우리나라처럼 체면이 중시되는 문화에서 질문은 ‘내 이해력 부족의 소치이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구려.’ 또는 ‘나는 무식하오.’라고 인정하는 자살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궁금할 때 질문하는 대신 나중에 혼자서 책을 보고 터득해 깨달으리라 다짐합니다. 


게다가 어른들이 말씀하실 때 말대꾸하지 않는 암묵적인 어른 공경의 문화가 예전에 비해 정도는 약해도 어느 정도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왠지 질문하려고 하면, 목구멍이 ‘턱’하고 막히는 겁니다. 문화의 압박은 개인이 거역하기 어렵습니다. 질문을 지양하는 토양에서 배우고 자란 우리가 질문 못 하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수동적인 듣기에 익숙해지니 습득도 늦습니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메타인지 능력이 발달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질문하기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너무 적나라해서 끔찍했습니다. EBS 다큐의 한 장면입니다. 2010년 11월 한국에서 개최된 G20 수뇌회의가 끝난 뒤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 말미에 개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겠다고 합니다. 사실 엄청난 특권을 제안한 것이지요. 한국기자들끼리 서로 질문하겠다고 나서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대단한 기회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는 한국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질문하지 못합니다. 뜻밖의 상황에 오바마 대통령은 아마 영어로 질문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그렇다고 이해한 듯 친절하게 덧붙입니다. 한국어로 질문하면 통역해줄 테니 질문해도 된다고 하죠. 그러나 끝내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의 특권은 ‘아시아를 대표해서’ 질문하겠다고 나선 중국기자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전 이 장면에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질문하기는 누구나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기자라는 업종은 어떻습니까? 취재를 업(業)으로 하는 직업군입니다. 기사를 쓰기 위한 취재는 기본적으로 질문을 바탕으로 합니다. 기자는 질문을 통해, 드러난 현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실재를 밝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러니 기자회견장에 있는 한국 기자들은 일반적인 한국 대중보다 훨씬 질문훈련을 받은 집단이라고 여겨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질문하지 못했다면 일반적인 우리 주변 사람들은 얼마나 질문을 못 한다고 봐야 할까요? 우리들의 질문 자아상은 자료화면에서 비춰지는 오바마 대통령의 표정보다 참담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어려운데, 도대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질문하는 걸까요? 그들은 드러나는 무지가 부끄럽지 않나요? 자존심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이 의문의 답을 한 신문 칼럼에서 얻었습니다. ‘질문’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이스라엘 학교에 두 아이를 보낸 한국 엄마가 쓴 해외 교육리포트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릴 때부터 세뇌하다시피 가르치는 게 있답니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그 순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모르는 걸 물어보지 않으면 평생 바보로 살아야 한다.” 

아하, 그렇다면 그들도 부끄럽다는 말이군요. 우리와 다를 바 없네요. 질문하기를 적극적으로 교육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질문할 수 있는 까닭은 부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질문하지 않고 넘어가서 평~생 바보로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괜찮은 장사 아닙니까? 작은 말을 희생시켜 큰 판을 얻는 장수의 수인 셈이니까요.      


질문 잘하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질문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질문하도록 ‘세뇌’ 하다시피 교육하고 고무시킨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들도 부끄럽지 않은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의 창피함을 극복하고 일어선다는 거니까요. 그건, 우리도 노력하면 질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니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질문하도록 격려하고 기회를 주고 기다려준다면, 우리 아이들도 일어서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아니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만 모르는 거 아닌가, 엉뚱한 질문 한다고 한 소리 듣는 건 아닐까, 괜히 나서는 거 아닌가, 진행을 방해하는 거 아닐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그렇다면 차라리 나 혼자 자료를 찾아서 살펴보는 게 더 남는 장사일 수도 있겠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궁금할 때, 바로 지금 물어봐야 해. 그래야 배울 수 있어. 질문을 통해 내가 모르는 사실을 가장 잘 배울 수 있어. 질문한다는 건, 머릿속에서 배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야. 배움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 이 질문을 통해 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까지 배울 수도 있어. 궁금한데 질문하지 않는 게 제일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바뀝니다. 우리가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질문하는 법을 배웁니다. 오늘도 제가 목숨 걸고 질문하는 이유입니다. 질문하지 않고 단 하루도 보내지 않는 이유입니다.     


질문하기. 안 하던 행동을 하려니 어색합니다. 그나마 많지도 않은 체면이 상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하지만 질척거리며 우리의 손과 발을 잡아끄는 옛습관을 끊고 질문학교에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질문학교에 입학하신 여러분을 온 맘 다해 환영합니다. 오늘부터 1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가 보이는 질문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