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호르몬의 장난
신기하다. 서른 살이 기점일까. 아이들에게 눈이 가다가 결혼 후에는 아기가 보이면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다른 이유가 없다. 아이가 그저 너무 귀여운 것이다.
유모차를 탄 아기, 아빠 품에 보자기를 싸고 있는 아기, 엄마 손을 잡고 아장대는 아기, 아니 사실 그냥 아기 존재만으로 뭔가 말 못 한 마력 같은 것이 있다. 같은 공간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미성숙한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 내면으로부터 말 못 할 감정 같은 걸 만든다.
나의 뇌피셜은 결혼을 하거나 임신과 출산을 앞둔, 그러니까 가임기의 남녀에게 그런 감정이 더 잘 올라오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떤 호르몬 같은 게 작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기에 대한 호감도를 상승시키고 그를 보호하고 애착하도록 만드는 호르몬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면 갈수록 아기에 대한 애착 같은 게 생기는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도 빨리 아이를 만들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마음이 간다. B가 친구의 아기를 보고 온 뒤 나에게 문득 보여주는 사진만으로도 그런 마음이 든다. 나의 아이가 아닌데도 그 생명의 삶이,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나와 B만 그런 건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유전자 안에 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한 건 이런 마음의 동함이 타인의 아이도 공동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키워나가는 사회적 육아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 개인적으로도 아이를 낳고 싶어 하게 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 또 다른 한 면으로는 마치 TV 육아 프로의 귀여운 아이들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귀여운 아이 모음집이 인기를 끄는 것처럼 단순히 ‘귀여움’만으로 아이를 소비하는 것 아닌가, 또는 그런 트렌드에 내가 따라가는 것 아닌가 하는 이상한 죄책감 같은 것도 있다. 아이에게 끌리는 것은 분명 귀엽다는 감정이지만 그 이후에는 아이를 둘러싸고 책임을 비롯한 다양한 것들이 필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아와 출산, 임신도 전의 연인의 입장에서는 물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눈앞에 귀엽게 애교를 피는 아이가 생길 거라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남들의 아이를 보며 우리 귀여운 아이를 어렴풋이 그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