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겨울왕국 <사랑은 열린 문 Love Is an Open Door>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겨울왕국 <사랑은 열린 문>이 나왔다. B와 함께 한바탕 춤을 추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스포 포함)
"아니, 안나랑 이걸 부른 남자 캐릭터는 알고 보니 나쁜 남자였잖아?"
"맞아. 정말 그러네."
"사랑은 열린 문이라고 같이 불렀는데... 프로즌 이외에 겨울왕국 최대 히트곡이 사기꾼과 같이 부른 듀엣이라니"
"너무 열려있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나 봐."
"그러게. 사랑이 열린 문이 아닐 수도?"
가사를 다시 곱씹어보기로 하였다.
항상 닫혀진 문 안에서 살던
제가 그댈 갑자기 만나게 됐죠
사실상 안나는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갔다. 그러면서 외부에 대해 환상을 갖게 되는데 이 환상이란, 굉장히 디즈니스러운 판타지다. 우연히 첫눈에 반한 남자를 만나고, 알고 보니 그 남자는 한 왕국의 왕자이고, 그 왕자와 드라마틱하게 이어지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하는 디즈니식 동화 말이다. 매우 설레는 전개다.
항상 저의 자릴 찾아 헤맸었죠
즐거운 파티에 갈 때나 작은 모임에서
동화 같은 꿈을 꾸는 것. 안나는 그런 꿈을 갖고 살아왔고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저의 자리'라는 건 내가 만날 사람의 옆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어디에나 그런 사람을 찾아왔다는 것을 말한다. 외부와 극도로 단절된 상황에서 가끔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꿈같은 사람, 자신을 자유롭게 하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젠 달라 그댈 만나
처음 느껴보는 특별한 기분
안나가 이웃나라 왕자 한스를 만나고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자마자, 이 사람은 뭔가 다르고 내가 꿈꾸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 느껴보는 특별한 기분'이란, 바로 자신이 바로 꿈꾸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라는 것이다.
둘이서 함께 (뭐요?)
다 먹어볼까요? (샌드위치!) (그 말 하려고 했는데!)
나하고 비슷한 사람은 처음이야 약속! 찌찌뽕!
생각하는게 같다는 건 한 마디로 운명이야
우리는 천생 연분
잘가라 지난 날 아픔들
이젠 돌아보지 않을래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이란, 운명이었다. 이렇게 운명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안나는 스스로 쉽게 만났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고, 섣부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날 자신은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절치부심을 했고, 그동안 쌓아놨던 어떤 '이상형'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있었다.
사랑은 열린 문
사랑은 열린 문
너무나 행복해 우리
우리 함께
함께 사랑은 열린 문
그렇게 안나는 한스에게 푹 빠지게 된다. 말 그대로 백마 탄 왕자였으며 친절하고 그녀를 환대했으며 무엇보다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열린 문이라며 노래를 부르며 이들은 바로 결혼을 약속한다.
그런데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모두 알다시피 한스는 안나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다른 흑심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내가 B와 대화하면서 많이 이야기하는 주제인데, 여성과 남성 중에 평균적으로 속내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남성이 압도적이고 특히 이성 간에 교제를 위해서라면 목표지향적인 남성은 그 능력치가 굉장할 거라고 말이다. 한스는 여성이 피해야 하는 가장 대표적인 남성성을 상징하고, 안나는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하는 '열린 문의 모순'을 상징한다.
디즈니가 그동안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주입시킨 이른바 '디즈니 판타지'를 부정했다는 건 지금 시대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백마 탄 왕자는 없으며 그런 왕자를 꿈꾸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사랑은 절대 열린 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을 찾기 위해선 반드시 마음 문을 열어둬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진짜 안나의 운명이 백마 탄 왕자인 한스가 아니라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던 크리스토프였던 것처럼 우리는 운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문을 열어젖히도록 두면 안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더욱.
안나가 꿈꾸는 모토는 '운명을 기다린다'였고, 마음 문 안에서만 사는 자신을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문을 활짝 열게 할 - 자신의 마음 문을 열어젖힐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반대여야 한다. 누군가 마음을 열도록 놔두면 안 된다.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않고 누군가 마음에 들어온다면 상대가 내 마음을 의지와 상관없이 장악해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처럼 말이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문을 닫고 있어야 하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서야 한다. 극 중에서 안나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캐릭터였다가, 종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며 사랑을 '찾아내는' 사람이 된 것처럼.
사랑은 열린 문이라는 것이 좋은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인류애나 기독교적인 아가페와 뜻이 통할뿐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절대 열린 문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누구나 안나처럼 왜곡된 이상형(실제로는 맞지 않는)을 가지고 있고, 이것 때문에 진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 판타지와 현실을 구분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필드에서 사람을,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 어느새 자물쇠로 굳게 잠근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 -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신호라는 것.
이미 완성되어 있는 운명 - 첫눈에 반하는 운명이 아니라 찬찬히 그리고 오래 보면 볼수록 스며드는 인연을 발견하는 것. 어쩌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쉬이 놓치는 것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