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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Nov 18. 2021

복제된 지구에 사는 당신께

아스트랄 마이크로 단편선

나는 지금 엄청난 사실, 아니 인류사를 뒤바꿀 사실을 발견하고 이렇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혹시 내가 자살을 하거나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건 이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디지털 트윈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야겠군요. 한때 입에 오르내리던 메타버스의 한 개념이기도 한데 쉽게 말하자면 현실 세계의 복제 버전을 말합니다. 현실의 공간, 물리 법칙, 그리고 변수들까지 동일하게 만든 제2의 공간이랄까요. 현실에 가능한 것들이 이 공간에 그대로 가능합니다. 디지털에 복제된 쌍둥이라는 개념이죠.


그래픽 엔진과 물리 엔진이 발달하면서 이 디지털 트윈을 요긴히 사용한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한 글로벌 건설업체는 집을 짓기 전에 이 디지털 트윈 공간에 그와 똑같은 집을 똑같은 방식으로 선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지켜보죠. 건축 재료를 바꿨더니 누수가 발생했다든지, 벽에 금이 발생하는 부실이 나타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거예요. 현실에 직접 돈과 시간을 들여 구축하지 않아도 이 가상의 디지털 트윈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줍니다. 데이터로 시행착오를 줄입니다. 그 목적이에요.


디지털 트윈 이야기를 길게 했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지구가 디지털 트윈입니다. 지구는 복제품입니다. 원본이 아니에요. 거대한 시뮬레이션입니다. 우리가 하듯이, 원본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한 시뮬레이션이죠.


충격이 컸다는 건 압니다. 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예지 되어 왔어요. 그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 불교의 해탈, 윤회의 개념 속에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유명한 철학자, 과학자, 종교지도자 할 것 없이 그 흔적이 묻어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 흔적들이 남아있지만 조각들을 모두 모으지는 못했어요. 실체에 대해 막연히 짐작만 할 뿐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너무나도 황당하기 때문에 여기서 밝히지는 않고 다른 메모를 통해 자세히 전달하겠습니다. 먼저 단서를 주자면 증명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시뮬레이션 안의 존재가 증명 따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메모에 남기고 싶은 것은 시뮬레이션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원본 지구의 쌍둥이 지구라면, 쌍둥이 지구는 무엇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말이죠. 과학자들은 우리가 미래에 초기술 문명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도 지구를 시뮬레이션하고 나아가 우주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정도를 하려면 은하 단위의 에너지를 쓸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겠죠. 하여튼 디지털 트윈을 만든 주체가 우리의 초미래 인류라고 했을 때 그들이 지금 과거 시점의 우리를 왜 시뮬레이션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신의 인간 창조 목적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요약됩니다. 우리는 신을 찬양하는 존재로 그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세상이 시뮬레이션인 것을 안 순간 저는 깨달았았습니다. 분명히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디지털 트윈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순수한 목적은… 맞아요.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니까요.


아마 우리 지구는 시행착오 시나리오-28469 정도 되는 시뮬레이션 멀티버스에 있을 겁니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 지구 중 하나입니다. 어떤 고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하나의 시나리오를 위해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어내는 지구라는 겁니다.


이 지구에 인류가 터를 잡고 문명을 만들고 땅과 하늘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전쟁과 수많은 왕이 스쳐가고 수많은 예언가와 수많은 광신도, 그리고 자본이라는 발명과 그 밑에 만들어진 과학의 뿌리들, 도시와 산맥, 해변과 심해, 모든 조형물들, 슈퍼스타들과 이름 없는 죽음들, 사랑이란 이름의 연인들, 범죄자와 구원자 모두가 이 하나의 시행착오 시나리오 위에 있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의 제작 주체가 미래의 인류든 전지전능한 신이든 최대한 보기 좋은 형태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릴 것이고 완벽한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시행착오를 줄여나갈 것입니다. 시뮬레이션을 주관하는 입장에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볼 수 있고 사소한 문제까지도 파악할 수 있으니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본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 지구와 우주의 시뮬레이션 시나리오가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어쩌면 그런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이 우주가, 이 지구가, 우리가, 그리고 당신이 느낄 진짜 감정입니다.


그저 우리가 최최최종_진짜 마지막. ver 마지막 지구 시뮬레이션 파일이길 바랄 뿐입니다.  닫힌 우주에서 모든 것을 알아버린 나의 바람은 이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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