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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Dec 20. 2021

멈출 수 없어 하트비트

아스트랄 마이크로 단편선

우식은 눈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점멸하며 하나씩 줄어드는 빨간 숫자. 참으로 공평하다고 우식은 생각했다.


우식은 세 개의 숫자가 있었다. 하나는 태어날 때는 없었지만 일정한 규칙에 따라 1씩 늘어나는 숫자였다. 세상에서는 나이라고 불렀다. 우식은 나이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태어난 지 오래됐다는 흔적 따위인데 말이다. 세상은 그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법적인 기준으로 삼았다. 그 숫자에 따라 세대가 나눠지고 의식도 서로 공유했다. 나이가 없어지는 세상을, 우식은 상상했다.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라는 숫자도 있었다. 지금. 방 안에서 반복해 불러보니 단어가 더 예쁘다. 우식은 지금을 좋아했다. 지금의 숫자는 추상적이었다. 지금이라는 순간을 인식하는 순간, 바로 과거가 되어버린다. 지금은 찰나이고, 지금 ‘이었던’ 그때를 일정한 숫자로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을 연장해 나가며 형태도 없고 목적도 없는 지금을 우식은 좋아했다. 그저 어떤 변화도 없어도 괜찮으니, 지금에 갇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볕이 따쓰히 들어오는 지금, 했다.


마지막 숫자는 우식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숫자이다. 나이도, 지금도, 싫어하고 좋아할 수 있지만 그저 어깨 한번 으쓱하면 모른 채 할 수 있는 숫자들이다. 하지만 마지막 숫자는 아니었다. 그 숫자는 우식이 앞으로 뛰게 될 남은 심장 박동 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료 기술이 쓸데없이 발달했다고 우식은 생각했다. 철이 들 무렵 자신의 잔여 심장박동수가 남들보다 현저하게 적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였다. 계산대로라면 남들이 한창 인생을 즐기기 시작하는 30대 중반에 심장의 맥이 끊긴다. 우식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물론 잔여 심장박동수를 밝힘 의료 기술의 발전은 우식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죽음의 개인적인 인지는 삶을 향한 인식을 바꾸는 혁명과도 같았다. 추상적인 사후를 약속하는 종교보다 오늘 하루를, 순간을 더 충실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줄어드는 박동수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게 됐다. 언젠가 죽는 인간이 아니라 언제 죽을 예정인 인간이 됐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붙어있었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그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한 신흥 산업도 발달했다. 지금 우식은 그래서 그 산업에 한가운데 있다. 그의 부모님은 우식의 심장박동수가 바닥날 1년 전부터 소위 웰다잉센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식과는 달랐다. 갈등이 컸다. 그냥 똑같이 살다가, 의식하지 않고 무심결에 죽고 싶은 우식이었다. 죽음을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지금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싶었다.


우식은 고개를 들어 숫자를 바라보았다. 백만 단위의 심장박동수가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다. 하루에 뛰는 심장박동수는 평균 10만 회. 이제 열흘 정도면 저 숫자는 0을 가리킬 것이다. 그쯤 되면 웰다잉센터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우식은 생각한다.


깜박깜박. 빨간 숫자가 점멸한다. 저 숫자가 갑자기 멈춰서는 상상을 한다. 지금, 말이다. 우식은 웃는다. 그래도 줄어드는 속도는 같잖아, 라며 여전히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숫자 사이로 볕이 널찍히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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