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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Dec 27. 2021

소개팅에 필터는 실례

아스트랄 마이크로 단편선

지선에게 오랜만에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다. 사수의 친구의 지인의 아는 후배가 좋은 사람 소개해달라는 것이 돌고 돌아 지선에게까지 왔다. 연애를 해본지가 언제였던가. 지선은 매우 오래된 유적을 발굴하듯 그 기억을 헤맸다. 대학 졸업 후, 일만 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가끔 친구를 만나고 여행도 갔지만 이따금 공허해지는 마음은, 그저 현대인들이 가지는 보통의 애환이라고 여겼다. 한마디로 연애가 하고 싶었지만 연애가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다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냥 사람 만나본다고 생각하고 만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훌쩍이며 사수가 말했다. 그런 사수는 지난 회식자리에서 5년째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울고불었었다. 본인은 남자란 존재의 반대론자가 되었으면서 아주 쉽게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지선에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만남은 쉽지는 않았다. 사람을 만날 수 있어도 마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았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지선은 페이스 필터 쇼핑을 했다. 단말기에 떠오른 홀로그램 얼굴들을 스와이프 한다. 매일 신상이 쏟아졌다. 얼굴 윤곽과  크기,  높이, 입술 모양이 패키지로 있었다. 고민할 거 없이 패키지를 선택했다. 성형도, 메이크업도 이제 필요 없었다. 필터를 팔아서 부자가 됐다는, 당신도   있다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였다.  필터를 판매한 플랫폼은 세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기업이 되었다. 시가총액이 얼마였던가. 물론 지선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지선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을 하고 다녔지만 그저 상대방에게 실망을 주는 외모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페이스 필터를 얼굴에 적용해 거울 앞에 섰다. 지난달 카드값도  못 갚았는데…라고 생각하며 결제 버튼을 누른다.


소개팅 당일, 지선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갔다. 상대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상대를 발견하고 싶었다. 실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회사도, 친구도,  온라인 아바타로 만나는 시대에... 바깥공기가 낯설었다. 지선은 긴장했다. 단말기를 꺼내 자신의 페이스타임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찰랑거리는 웨이브진 긴 머리에 둥근 이마, 큰 눈과 대비되는 작고 귀여운 코, 볼에는 약간 홍조가 있어서 소녀 같은 이미지였고 입술은 약간 두툼하면서 촉촉했다. 요즘 유행하는 얼굴이었다.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AI 기술로 페이스 필터를 덧씌우는 스마트 렌즈는 잘 작동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유행을 따르려면 실제로 얼굴뼈를 깎는 고통과 전문가 정도의 메이크업 실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저 얼굴의 페이스 필터를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한 다음, 내 얼굴에 적용하면 그게 다였다. 누가 봐도 아주 예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누구나.


카페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지선은 자신 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남자는 머뭇거리며 지선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지선 씨 맞으신가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 물론 목소리도 보이스필터가 있기 때문에 진짜 일지는 모른다. 진짜든, 필터든 이 목소리는 마음에 든다라고 지선은 생각했다.

"네, 맞아요."


커피를 시키고 약간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지선은 그제야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굵은 눈썹에, 오똑한 코,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와 그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 검은 머리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남자를 스캔하는 도중, 지선은 남자 또한 자신을 스캔하고 있다고 느꼈다.

"선배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말을 꺼냈다. 어색한 정적이 깨졌다.

아, 네. 저도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지선은 여전히 긴장하여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마시다 입천장을 덴다. 얼굴을 찌푸리는 지선을 보고 남자는 괜찮냐고 물었다.

네, 괜찮아요. 소개팅 자리가 정말 오랜만이라, 아니 바깥에서 사람 만나는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 좀 긴장했나 봐요.”

남자는 그런 지선을 보며 웃었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자리는 처음보다 편해졌다. 지선은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고 매너가 있었다. 물론 외모적으로는 믿을 게 못됐다. 목소리나 얼굴이나 모두 필터 빨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선의 렌즈를 통해, 남자가 설정한 필터가 보인다. 지선이 남자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바랐던 것처럼 남자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지선은 욕심이 생겼다.


저기 잠깐 화장실 좀”

지선은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섰다. 예쁜, 하지만 낯선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지선은 눈에서 렌즈를 힘겹게 제거한다. 애초에 눈에 영구 삽입하는 것이 당연한 요즘에, 지선은 좀 달랐다. 구닥다리 스마트 렌즈 모델을 사용했고, 그게 오늘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거울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화사하던 숙녀는 사라지고 칙칙한 피부에 우울한 표정의 여자가 서있다. 지선은 곧 머리를 젓고 입을 결연히 다문채 화장실 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지선은 소개팅 남자에게 다가섰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남자가 지선을 바라봤다. 지선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렌즈의 필터를 통해 말고 그냥 그 남자를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진짜 그 남자 말이다. 그런데 지금 지선은 그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남자는 남자였다. 그대로였다. 렌즈를 빼기 전에 봤던 남자. 외모와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였다.

어… 실례지만 필터 같은 거 안 쓰시나 봐요?”

엇, 어떻게 아셨어요? 저… 사실 필터를 별로 안 좋아해서 설정 안 하고 다녀요. 친구들은 원시인 아니냐고 놀리는데 저는 좀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필터를 한 모습이요?”

아니요. 그냥 제 모습이 아닌 모습을 하는 거 자체가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필터 하는 사람들 다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지선은 근 5년간 필터를 하지 않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진짜 원시인이었다. 심지어 부모를 만날 때도 필터를 설정하니까. 지선은 남자 앞에서 말을 줄이다가… 순간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다.


그럼… 혹시 스마트 렌즈 뭐 쓰세요?”

아, 렌즈요.”

그러면서 남자는 가방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낸다.

시력이 나빠서 가끔 요거 씁니다.”

지선이 보니 스마트 렌즈 출시 이전에 나온 시력 개선용 렌즈다. 필터도, 증강현실도 하나도 작동되지 않는 구닥다리 렌즈.

그럼 지금은 렌즈를…”

지금은 이거 쓰고 있어요. 보통 안 쓰는데 중요한 날만 써요. 오늘 같은 날이요. 지선 씨 만나니까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요.”

남자는 멘트를 잘했다고 느꼈는지 말을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하지만 지선은 웃을 수가 없었다.


자꾸 물어봐서 죄송한데… 그럼 저 지금 어떻게 보여요?”

“지선 씨요?”

저 지금 필터 없이 보고 계신 거예요?”

맞아요. 원래 지선 씨 모습 보고 있어요”


지선은 순간 꽥 소리를 질렀다. 카페 내에 - 홀로그램으로 들어와 있는 손님들이 다 지선을 쳐다봤다. 남자도 당황해서 자신이 어떤 말실수를 했는지 생각했다. 물론 실수는 맞았다. 마치 풀 헤메코를 하고 간 소개팅에서 갑자기 쌩얼이 된 셈이니까. 필터가 꺼진 채 소개팅 남을 만날 거란 건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과 도망치고 싶다는 우울감과 수직 낙하하는 자존감이 소용돌이쳤다. 남자도 그런 지선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미안해요. 원래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렌즈를 안 낀 건 아니에요. 당황스러웠다면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숙인 지선도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여전히 얼굴을 푹 박은채로 대답했다.

“… 아니에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도 렌즈를 뺐어요. 실제로 어떻게 생기셨는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는 원래 이렇게 다니는데요.”

제 얼굴 보고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지선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실망이요? 전혀요. 오히려 좋았는데요.”

괜히 제가 우울해하니까 기분 좋으라고 하시는 말이죠.”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순간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진짜 그의 목소리라는 걸 아니까 그런 걸까.


지선은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그가 지선을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필터 없는 진짜 지선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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