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STR Jan 04. 2022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

아스트랄 마이크로 단편선

지겹다 이제.


정택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택은 홀연히 사라지는 상상을 한다. 이어폰 볼륨을 높인다. 의사는 고질적인 청각 장애를 일으킨 원인이 이어폰 때문이라고 했고, 상사는 아직도 선 달린 이어폰을 쓰냐며 무선 이어폰이 얼마나 좋은지 일장연설을 했다. 정택에게는 의미 없는 말이었다.


전철 안에는 항상 철과 사람의 땀이 뒤섞인 냄새가 난다. 익숙하지만 솔직히 정겹지는 않다. 매일 첫차를 타고 막차를 타는 정택에게 전철을 그냥 거기 있기 때문에 그곳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루의 얼마만큼은 차지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논리라면 정택에게 그녀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졌어야 했다.


승강장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화면의 빛으로 환하다. 의자에 앉아 저 멀리 전철이 들어오는 방향을 멍하니 보는 여자도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냄새에 익숙하겠구나 그런 생각에 정택은 조금 동질감을 느낀다.


요즘도 바다 생각 많이 하세요.


상담 의사는 우리 부부 관계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동질감은커녕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와중에 의사는 단 음식에 대한 효능 따위를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전철 안에 올라타자 한기가 가셨다. 정택은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엉덩이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해방되거나 전환점을 맞을 때 바다가 나왔다. 정택에게 바다란 그런 이미지가 있었다. 의사도 억압된 심리가 바다에 대한 욕망으로 발현되는 거라고, 의미 모를 어려운 말을 했다. 정택의 말보다 의사의 말이 더 많은 것은 상담이 원래 이런 건가 싶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정택에게는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부부도 결국 인간관계의 하나예요.


우울증 약을 처방해주며 의사가 했던 말은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의 관계는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모두 공유해야 해요. 공유하고 공유해서 빈틈없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하나의 의미가 돼요. 그러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나와 동떨어져 있다면 그건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죠. 강남 의사답게 좋은 발음이 귀에 타격감을 줘서 그 단어들이, 그 문장이 난청인 정택에게도 아주 잘 들렸다.


전철은 오이도행이었다. 항상 말했듯, 바다를 보고 싶었고 의미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수도권의 바다를 선택한 것뿐이다.


상담 한번 받아보자.


아내가 먼저 제안을 했었다. 정택은 고민 없이 알았다고 했다. 매번 사소한 이유로 다퉜다. 큰 소리를 질렀고, 둘은 결코 접해지지 않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바다가 보고 싶다는 정택에게 아내는 태평한 소리 하고 있다고 핀잔을 줬다. 생각을 공유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의사의 말은 강남에나 있을 법한 사치였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오며 보는 아내의 얼굴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해 보였다.


상담 의사는 달변이었다. 마음을 전달하는데 서툰 정택과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함께 부부 상담을 하면서 정택은 의사에게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자신이 평균인 줄 알았던 정택은 충격을 받았다. 정택이 살아온 그 감정과 기분이 보통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정택의 타인들 - 그러니까 우울하지 않는 삶이란 게 존재한다. 그 생각에 정택은 또 우울해졌다. 전철은 오이도로 쏜살 같이 어둠을 쫒았다. 지금 전철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은 정택이었다.


집에서는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그녀가 상담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크게 웃는 것을 보았다. 의사는 무척이나 유머를 잘 구사했다. 똑같은 유머를 정택이 했을 때는 그 맥락이 살지 못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정색했다. 자신이 우울증을 앓는 남편이기 때문에 그랬다. 그녀에게는 채무감 같은 것이 있었다.


새벽녘의 전철은 정택처럼 우울한 필터가 껴있다. 4호선 종점 오이도역에 도착했다. 매일 전철을 타는 정택이지만 오이도는 처음이었다. 역을 나서자, 콧속으로 이따금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들어왔다. 차가우면서 역겨운, 기억.


정택은 택시를 타고 오이도 빨간 등대로 가달라고 했다. 오늘은 새해라 쉬는 택시가 많아요. 물어보지 않았는데 기사가 말을 시작했다. 정택은 네, 하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기사도 정택의 눈치를 보더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전철에 같이 탔던 그 드문드문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사람들은 다 공유하고 사는 걸까. 의미를 찾았을까. 정택은 차창 밖 어둠과 빛이 흘러 지나가는 걸 멍하니 보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눈물이 났다. 정택은 놀랐다. 그 의사가 아내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몰랐을 뿐이다.


다 왔습니다.


정택은 기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오이도였다. 바다는 없었다. 대신 사막 같은 갯벌이 있었고 갈매기 대신 비둘기들이 날아다녔다.


참 정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개팅에 필터는 실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