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리 양이 잊어버린 것

영화 <도리를 찾아서>와 기억

by ASTR

가끔 그녀는 잃는다와 잊는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건 무척이나 묘한 경험이었다. 이따금 걸려오는 전화 목소리에 어제처럼 똑같은 공기를 머금고,

"안녕, 내 이름은 도리야"


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 말이다. 어둠 속에, 혼자서. 입가에 맴돌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녀가 눈을 들어 본 것들은 모두 낯선 것들 뿐이었다. 언제나. 언제나, 그랬다.


"그건 브레인프리징이라는거야"

"브레인..뭐?"

"브레인프리징이라구."

도리의 머리를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린이 말한다.


"우리 머리속 뇌에는 말이지. 기억이나 정보 같은 것들이 죄다 저장이 되는데, 이게 어떻게 출력이 될까. 바로 시냅스. 두뇌 안에 길.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영역은 그 길이 빠르고 더 넓게 만들어진다고 하지. 그 길이 닫히면? 우리는 그 영역을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해."


"영원히."

"그래, 영원히 말이야."

도리와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 영원.


눈을 깜박이는 속도만큼 잊어버리는 도리는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었다. 매일 출근하는 그 길을 잃어버리고, 직장 동료를 알아보지 못했다. 해야할 일을 놓치기 일수였다. 상사는 그녀에게 소리쳤지만, 돌아서며 누구냐고 물었다. 8개의 직장을 그만 줬다. 그후 그녀가 정착한 일은 프리랜서 작가 일이었다. 친구 말린이 소개해준 작은 일거리였다. 규칙적이지 않고, 단편적인 일만 하면 되는 것이 딱 그녀의 기억과 닮았다. 그녀는 기뻤다.



"작은 글 한쪽 쓰면 된다는게, 마치 내 기억의 영역을 넓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만 있다가 날아가버리는 공기 같은 기억들이 여기, 여기 다 까맣게 남아있잖아. 봐봐."


도리가 조그맣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영원으로 남기를. 까맣게 새겨진 글자처럼.


그녀의 하루는 특별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 옆에 붙은 화살표가 그려진 포스트잇가 보인다. 따라간다. 화살표를 따라가면, 그 끝에 소책자 하나가 놓여있다. 책의 제목은 <도리에 대하여>. 도리가 직접 쓰고말린이 감수한 28쇄 버전이다. 도리는 그녀의 역사를 읽고, 그 역사가 다다른 오늘이란 시간을 인지한다. 까맣게 태어난 그 시간 속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하얀 글자 같은 것들이 많았다고, 그렇게 매일 아침.


그녀는 해야 할일을 한다. 아침을 먹고, PC를 켜고, 업무를 확인하고, 제때 원고를 넘기기 위해 바쁘게 일한다. 문득 모든 것이 블랙아웃이 될때, 책상 앞에 놓인 글귀를 읽는다.


"괜찮아. 나는 도리야. 내가 도리인 것은 절대 잊지 않아."


하루의 일과가 끝날 즈음에는 스탠드만 켜둔 어둔 방안에서, 내일의 도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도리에 대하여>에 적는다. 그리고, 잠에 든다.


그날밤,

도리는 기억 종이 파편들을 만났다. 가지고 있어야 할것들. 꼭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 바람에 날려 저기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잡으려고 애써봤지만 손에 잡히는 건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기억쪼가리들. 불에 타들어가는듯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코 도리가 잡지 못할 곳까지 날아버린 기억들.



그때 그녀는 잠에서 깼다. 숨을 헐떡이며, 악몽이었다. 악몽이였고 아직 어둔 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가 어딘지 무엇을 하고있었는지. 손을 들어 바라보는 그 광경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우주에 홀로 떨어져 사방은 캄캄란 암흑. 공기가 없다. 숨이 막힌다.


그녀를 인도했던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책상 위에는, <도리에 대하여>가 없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가며 숨을 헐떡인다.


책상을 뒤엎고, 서랍을 뒤지고, 모든 책을 펼쳐본다. 어느 곳에도 그녀의 기억은 없다. 침대 밑에도, 화장실에도, 신발장에도.


새벽 4시 20분, 그녀는 가끔 잊는 것과 잃어버린다는 걸 구분하지 못했다. 고독한 밤은 그녀를 홀로 두었다. 어떤 글자도 쓰여있지 않은 도리는 방 안 구석의 가장 어두운 곳에, 한껏 쭈그린 자세로.


멀린이 그녀를 발견한 건 그날 아침 8시였다. 출근길에 들린 참이었다. 도리는 방 안에서 떨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리야! 괜찮아?"

"누..누구세요."

"나 말린이야. 네 10년 친구 말린."

"말..린?"


말린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성할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그는 금새 <도리에 대하여> 책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책을 찾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시냅스가 닫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떨고 있는 도리의 손을 잡으며 말린은 말한다.


"도리에 대하여."


말린은 그녀에 대해 쓴 책의 모든 문장을 이야기해준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기억은 사람을 정의한다. 기억이 경험이고, 경험이 인생이다. 말린은 그녀의 비어있는 기억주머니에 하나하나 그 기억종이를 넣는다. 기억을. 경험을. 도리의 인생을.


말린이 책을 모두 이야기하자 도리의 몸 떨림이 멈췄다. 공백의 우주에 아주 조그맣게 까만 글자가 새겨진다. 그렇게 아주 조그맣게 도리가 말린을 부른다.


"말린."

"그래, 도리야."

"다시는... 다시는 사라지지마."

"그래."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남아줘야 돼. 난 널 잃어버리지 않을거야."

"잊어버리지 않는거겠지."


여전히, 도리는 잊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상관 없겠지. 그녀에게는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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