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토피아

디즈니 <주토피아>의 평행우주

by ASTR

여성이 대통령이 되었다. TV속 그녀의 얼굴은 매우 편안해 보였다. '변화'니, '혁신'같은 말들이 얼굴 주위로 떠올랐다.


일곱살 주디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디에게 변화란, 이런 것이다. 아빠가 말한다.

"야, 숙제 다 했어?"

"응. 아까."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런게 변화다. 물론 안했다. 숙제 말이다. 일일히 검사해보지 않을거란 걸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이란, 주디에게 혁신이다. 이렇게 편한 게 있다니.


식탁 위에 얼굴을 간신히 반쯤 걸친채 콘푸로스트를 떠먹는다. 아빠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창 앞에서 떨어지는 천장 물기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뚝뚝. 차갑게, 물이 튄다. 바닥에는 물이 찰랑거리는 바가지 몇개가 놓여있다. TV를 보다가 주디가 말한다.

"아빠, 나도 대통령 될 수 있어?"

"...."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더니, 아빠는 천장 물기를 닦았던 걸레를 쭉 길게 늘어뜨리고 채찍처럼 휘두른다. 주디가 먹던 콘푸로스트 그릇이 바닥에 엎어졌다.

"이년이 쓸데없는... 나가서 이거나 사와!"


아빠가 가리킨 것은 벽 한쪽에 나란히 모아져있는 소주병들이었다. 나란히, 놓인 것만큼이나 아빠가 아끼는 것들이였다. 어쩌면 주디보다도. 아빠가 던진 돈 몇 천원과 동전을 주웠다. 걸레 채찍을 피해 문 밖에 서서 주디가 중얼거린다.

"뭐야, 똑같잖아."


밤공기가 차다. 반지하 계단으로 걸어나온다. 별수 있는가? 돌아갈 수는 없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가 온뒤라 그런지 별이 수두룩하다. 반짝


거리는 저것이 멀리서 우주를 뚫고 행성과 은하수 사이를 여행해 여기까지 온 사실이 마냥 대견한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주디는 대통령이 아니면, 저런 별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내 별의 행진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궁금해졌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총총걸음으로 눈앞에 흐르는 밀키웨이를 잡으려 한다. 잡힐듯, 황홀하다. 그리고 몇 초후, 그 남자와 부딪힌 건 순전히 주디의 잘못이었다.

"야, 뭐야! 똑바로 보고 안다녀?"


주디는 중학생 아니,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바지까지 더럽히고 말았다. 눈을 크게 부라리며 큰소리를 내는 이 남자에게 주디는 겁을 먹었다. 눈알과 큰 소리 때문은 아니였다. 그걸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이 집안에 있으니까. 주디가 남자를 보고 겁에 질린 건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주디가 처음 보는 모습이였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했고, 머리카락은 꼬불거렸다. 키는 무척 컸고, 심지어 팔다리도 길었다. 주디는 겁에 질렸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엄..엄마."

얼굴도 모르는 엄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차라리 아빠한테 맞는 편이 나았다. 최소한 얼굴은 익숙하니까. 괜히 여성 대통령이 말하는 변화 뭐시기 때문에 나섰다가 이 곤경을 겪는거 아닌가. 주디는 눈을 질끔 감았다.


주디가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남자가 주디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손등은 까맣지만 손바닥은 하얀, 주디가 보기에 그건 무척 크고 예쁜 손이었다. 그에 비해 무척 작고 작은 손. 손가락 크기만한 주디의 작은 손을 그는 자신의 손으로 무척 쉽게 '묶었다'. 묶었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하지만 확실한 건 아빠의 손과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아빠의 손은 주디를 묶은 적이 없으니까.


"쬐끄만게... 야, 집에 가!"

남자는 주디를 일으키고는 제 갈길을 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히 사라지는 그의 뒷주디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뭔가 정신이 들었는지 급하게 먼지를 털고, 그를 따라간다.


"저기, 이름이 뭐야? 나 저기 저쪽에 사는데, 어디 살아? 몇 살이야? 삼십살? 우리 아빠도 삼십살인데! 어디 가? 나도 따라가면 안돼?"

"아, 되게 쫑알쫑알대네! 씨끄럽고, 좋은 말할때 얼른 집에 가라!"

"집에 가기 싫어. 같이 가면 안돼?"

"아이, 귀찮게. 저리 안가면 혼낸다!"

남자는 팔을 들어 손바닥을 쫙 편다. 이건 만국공통의 혼내는 시늉이다. 아하, 이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할 주디가 아니다. 이미 잔뜩 면역이 되어있으니까.


"에이씨, 나도 몰라."

남자는 동네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다닥다닥 주거지역이 밀집된 이곳의 유일한 24시간 편의점이다. 물론 우리의 주디도 따라 들어간다.


"어, 왔어?"

"어."

"근데 쟨 누구야?"

알바생이 주디를 가리키며 묻는다.

"나도 몰라. 그냥 계속 따라와."

"그냥 따라왔다고? 지금 12시인데?"

"그래."

"납치했냐?"

"뭔 개소리야."

"야, 밤중에 니가 쟤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전 아무 잘못도 없어요 얘가 그냥 따라왔어요'하면 사람들이 잘도 믿어주겠다. 네 얼굴이 좀 납치법 같아야지"

"이 자식이 진짜..."

"장난이야 장난"


알바생은 그 남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긴다. 계산대에는 이제 그 남자가 서있다.

"야, 그럼 난 퇴근한다. 수고"

"가라."

"야, 가라가 뭐냐 가라가. 좀 사랑을 담아줘라. 그건 그렇고 쟤 빨리 엄마 찾아서 보내. 너한테도 책임이 있을걸?"

"뭐?"

"그럼 난 집에 가서 꿀잠 자야지~"


알바생이 경쾌하게 사라진 편의점에는 적막이 흘렀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린채 편의점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져대는 주디를 노려본다. 그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야."

"응?"

"너 진짜 집에 안가냐?"

"응"

"저기 앞이래매. 집 모르는건 아니지? 경찰 부른다?"

"경찰? 나 경찰 아저씨 좋아하는데!"

"...야. 왜 나한테 그래. 안그래도 피곤한데"

"흠... 오빠 손이 따뜻해서."

"뭐?"


남자는 자신의 까만 손등을 내려다본다.

"야, 너 이름이 뭐야."

"나? 주디."

"나이는?"

"일곱살."

"완전 코딱지 만한게..."

"그럼 오빠는?"

"뭐가?"

"이름이 뭐냐구."

"내 이름 알아서 뭐할라고."

"이름이 뭐야. 이름! 궁금하단 말이야!"

"알았어. 소리 좀 지르지 말아라. 난 닉 와일드야. 닉이라고 불러."

"닉! 닉! 닉! 닉!"

"그만해라. 시끄럽다고..."


닉이라는 남자였다. 정확히는 16살이였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 사라졌다. 어머니는 저 먼 아프리카 땅에서 아빠를 찾겠다고 바다를 건넜다. 아빠를 찾는 유일한 단서는 그가 남긴 쪽지였다. 쪽지에는 유학생이였던 그가 자국어로 쓴 글이 적혀있었다. 쪽지에 뭐라고 적혀있는지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서야 알게 됐다.

"내가 미쳤다고 너랑 결혼하냐?"


주디가 사는 곳 멀지 않은 곳에 닉과 그의 어머니가 살았다. 어머니는 또 멀지 않은 곳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청소와, 설거지와, 비아냥과, 또 설거지와, 청소를 했다. 12시간을 일하고 6만 6천원을 벌었다.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게 없었다. 그래도 닉, 공부는 시켜야지 우리 닉 하며 어머니의 뒷모습만 보던 닉 와일드였다. 일년 전, 엄마 몰래 밤에 나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불법이였지만, 노안인 탓에 당연하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던 닉의 눈 앞에 지금 이상한 생물이 있다.

"닉 오빠. 나는 대통령이 될라구. 아니면 별이 될거야!"

"그러셔."

주디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어제 읽다만 책을 마자 편다.

"오빠는 뭐가 될거야?"

"뭐?"

"나중에 뭐가 될거냐구! 뭐 있잖아. 대통령이나 별이나."

"...몰라. 생각해본 적 없어 그런거."

"그럼 지금 생각해봐!"

"뭐, 공무원 시험이나 볼라구"

"공무원이 뭔데?"

"공무원? 공무원... 그 뭐야 나랏일 하는거지. 아, 너 경찰관 좋아한다고 그랬지?"

"응! 나 경찰 아저씨 좋아."

"경찰관이 공무원이야."

"진짜? 그럼 나 공무원도 좋아! 오빠 꼭 공무원 되라, 응?"

"얘가 언제 날 봤다고 이래라 저래라냐, 안되겠다. 너무 늦었어. 지금 한시야 한시. 전화해야겠다. 112가 경찰 전화번호인건 알지?"

"싫어!...경찰 아저씨는 좋은데, 집에 가긴 싫단 말이야."

"그래도 가야돼."

닉은 번호를 눌렀다. 1과 또 1과, 그리고


닉이 그 순간 고개를 든건 순전히 우연이였다. 익숙한 엄지손가락으로 세 번호와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일이였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 '집에 가기 싫다는' 주디의 목소리가 귀를 거쳐 뇌 어딘가에 머물렀다.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가끔 닉이 어머니에게 들었던 그것 같은.


닉이 고개를 들자, 카운터 앞에 고개를 숙인채 있는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다. 작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닉은 주디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울고,


있는 주디를 보니 더 이상 4를 누를 수 없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할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이 직접 데려다주는 편이 낫겠다, 라는 생각을 닉은 하는 것이였다.


'따릉'

그때 편의점 문이 열렸다. 아저씨 두 사람이 들어온다.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진한 술냄새도 함께 풍겨온다. 아마 이 근방의 술집에서 거하게 회포를 푼 직장인들일 것이다. 그 중 한 남자가 카운터 앞 닉에게 말한다.


"야... 담배 줘!"

"어떤 걸로 드릴까요?"

"내가 맨날 피는거"

"어떤 걸... 말하시는지"

"야,"

"네, 손님"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몰라?"

"말씀을 하셔야..."

"내가 탁 말하면... 탁 알아들아야지! 담배 달라고! 내 말을 지금 좆같이 듣냐?"

남자의 얼굴이 붉다. 얼큰하게 취해서 카운터 위에 올라갈 기세다. 음료수 코너에 있던 다른 사람이 기어코 달려왔다.

"아이고, 너무 취했네. 죄송해요. 오늘 좀 많이 마셨다."

"나, 하나도! 한 취했어! 담배 사러 왔잖아 담배! 이 놈이 담배를 안줘!"

"그거 뭐지, 말보로 라이트일 거에요. 그걸로 주세요"

"네"


이런 일은 다반사다. 닉은 주디 쪽을 본다. 어느새 구석에 숨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잘 숨었네. 이런 사람들, 무섭게 보이겠지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것도 있다.


" 아! 근데 자세히 보니까! 깜둥이네?"

"...."

"여기서 뭐하냐! 너네 나라로 꺼져! 너네들 때문에 우리 일자리도 없어지잖아! 벌레 같은 새끼!"

"야, 너 너무 취했다. 그만 하고 나가자"

"뭘 그만해! 사실이구만. 얼굴이 까맣잖아! 너는 안보여!? 나는 똑똑히 보이는데! 빌어먹을 깜둥이 새끼!"

"...."


깜둥이라는 말은 뭐, 익숙해졌다. 사실 말 때문이 아니다. 깜둥이든 노랭이든 뭔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어떤 느낌은 그를 통나무에 묶어 나이아가라 폭포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모두로부터 찢어지는 죽음과 가까운 감정. 닉은 카운터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그를 가만히

보며 아까 누르다가 만 번호를 누른다.

"4"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왔고, 깜둥이포비아는 연행됐다. 경찰들도 참 고생이다. 술에 깨면 아무 기억도 못할 사람을 데리고. 하지만 술이든 뭐든 원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말을 한 건 분명하다. 닉은 그걸 너무나 잘 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 깜둥이나 잡아가!" 끝까지 소리를 지른다. 매우 까맣고 지독한 술냄새를 남기고.


편의점의 새벽, 짧은 소동이 끝났다. 주디가 닉 옆에 조르르 붙는다. 편의점 문을 나서던 나머지 경찰 한명과 눈이 마주치자, 주디는 얼른 닉 뒤로 숨는다.

"왜, 너 경찰 아저씨 좋아한다며."

"좋긴 한데... 나 집에 보낼거잖아."

"..."


주디를 본 경찰이 닉에게 다가왔다. 닉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경찰은 주디를 데려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편의점에 계속 있을 순 없잖니?"라며 경찰은 주디를 달랬다. 또 주디는 토끼처럼 울고 있었다.


그리 좋아하던 경찰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주디는 편의점 문을 나섰다. 아마 근처 작은 파출소로 가겠지. 거기서 부모님을 부를거야. 닉은 잘 안다. 몇번 가본 적 있다. 물론 일곱살 때는 아니였다. 그 아이에게, 너무 삭막한 곳이 아닐까. 역시 자기가 직접 집에 보내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편의점의 밤은 무섭도록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디를 만난 그날은 금새 잊혀져갔다. 닉의 아르바이트는 어머니에게 들켰다. 닉 앞에서 몇번이나 눈물을 보였고, 닉은 앞으로 거짓말을 안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대신 또다른 약속을 했다. 대학은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고 말이다. 그건 무척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래, 어떤 공무원하려고?"라는 질문에 닉은 '경찰관'이라고 대답했다.


하늘이 까만 늦은 밤, 검정고시와 공무원 준비를 하는 닉에게 어머니가 사과를 깍아주며 말했다.

"힘든 건 없어?"

"괜찮아요. 학교도 안가니까 신경 쓸 것도 없고. 이거 조금만 하면 이제 행정 쪽 마스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사과 한쪽을 포크에 집어 닉에게 준다. 대견하다, 는 작은 목소리와 함께. 어둔 방, 작은 스탠드가 있는 그 책상 위에 사과가 유난히 노래보인다.

"그나저나 오늘 요 앞에 경찰들이 많이 와있던데. 무슨 일인가 몰라. 식당까지 찾아왔더라."

"무슨 일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듣기론 요기 동네에 어떤 얘가 죽었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맨날 때렸다고 하던데. 요즘 세상이 너무 무서워졌어. 어떻게 아이가 죽고..."

"얘가.. 죽어요?"


순간 손이 들었던 펜을 내려놨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이다. 그럴 확률은 없고, 없어야만 한다.


"엄마, 잠깐 나갔다올게요"

옷을 급하게 입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지만 들리지 않았다. 경찰서로 한번도 쉬지 않고 뛰어갔다.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자, 마치 어제 본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닉의 미래가 주디를 만나는 곳. 세상 모든 황량한 공기가 느껴졌다.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경찰관들은 널찍히 닉을 바라보았다.


회색 콘크리트 벽 위에 TV에는 여성대통령의 어린이날 특별담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미래입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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