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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Jul 25. 2016

거인은 꿈을 꾼다

디스트릭트의 최은석을 기리며

메일을 몇번이나 썼다 지웠다. 썼다가, 또 지우고 눈을 한번 감고.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던 것들. 순금의 피라미드 아래로 흐르는 모래 조각들.


그들은 나를 '체이'라고 부른다. 체이, 라는어감에서 친숙한 냄새가 났다. 내가 가진 성이 그 사람들 앞에서 새로 세워져서일까. 체이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디스트릭트라는 나의 또다른 성 - 그래, 디스트릭트는 나의 성이다 - 을 세웠다.


폭염이 쏟아지던 여름이였고, 반팔에 반바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프리한 - 대학생 프리랜서 디자이너. 그 해에 한 방위산업체에 알바로 고용됐던 날. 판교에 있던 작은 사무실. 냉방병이 걱정되는 에어콘 바람 아래 앉았었고. 또 매일 아침 새로운 일거리가 책상에 잔뜩 던져졌다. 일감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단내가 났다. 이러이러해야 하는데 아직 이러이러한 모양새를 띄지 못한 불완성작들. 그 일은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나는 쉐프. 칼자루를 쥔. 상상하다는대로, 상상의 크기만큼 현실로 초대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디자인의 세계에 들어오라. 나는 그 세계의 조물주였다.


며칠 뒤, 한 남자가 내 자리에 찾아왔다. 사울대 출신의 엘리트였다. 고개를 컴퓨터 화면까지 숙이고, 눈살을 찌푸린채. 그 전에 아무도 내 자리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없었기에 더 자유로왔을까. 여러 창이 지저분하게 띄어진 작업 화면이 괜히 신경쓰였다. 내 머릿속이나 다름없는 화면을 뚫어져라 보던 그의 표정.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의 말까지.
"...너처럼 웹디자인 잘하는 친구를 본 적이 없다."


그 놀래킴. 어쩌면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는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어릴 때 보면 처음 보는 아이인데 하루 종일 같이 놀고, 내일도 같이 놀자, 라고 말하는 친구 있지 않나. 그들과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회사를 차렸다. 디지털 웹 디자인 회사였다. 1973년생 동갑내기 세명이 대표가 됐다. 서울대 국제경영학을 졸업하고 삼성물산에서 상사맨으로 일하다 합류한 이대표는 재무 관리 대표로,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나온 김 대표가 총괄 대표로, 그리고 경희대 사회학과를 나온 내가 비전공자 출신임에도 디자인 개발 대표를 맡았다. 우리는,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 잘 어울리는 조합이였다. 그게 찰떡궁합이라는 말이겠지.


그래, 다들 우리를 찾았다.

삼성이, 현대자동차가, 펜디가, 티파니가, 알렉산더 맥퀸이 그 대단하다는 기업들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싶어했다. 왜 그랬을까. 한가지, 그 어떤 한가지가 다른 무언가를 우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른 걸 보여줬다. 타파니 건물을 다이아몬드로 변신시키고, 제트폰 프리젠테이션에서는 영화 마이너리포트처럼 화면을 공중에 흩뿌렸다.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 그게 너무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컴퓨터 안에만 있던 조물주의 세계가 그 영토를 조금씩 확장하고 있었다.


"맥퀸 일을 한다고 맥퀸이 되지 않아. 나는 맥퀸 자체가 되고 싶어."
대표들과 저녁을 먹던 중에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진짜 크리에이티브한 집단이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하는 롤모델이 있냐고 물을 때마다 두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체이, 우리 회사를 그렇게 만들자."


그들의 말은 마치 아직 맛보지 못한 달콤한 초콜릿 같은 맛이 있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에이티브라는 것이 항상 그랬다. 어딘가에 귀속되거나 일방향적이거나 일회성이었다.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 아니었다. 반짝이던 크리에티브가 그렇게 태어나 머리 위의 빛나는 태양이 되지 못한채 추락하고 말때, 나는 하나의 아이를 유산하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에이티브는 실제로 살아서 사람과 이어져야만 한다. 그 연결점은 나의, 디스트릭트가 만드는 디지털 영토의 핵심이었다.


2011년 새해, 나는 직원들에게 메일을 썼다.  오랫동안 혼자 구상해온 생각이었다.

"...디지털 테마파크?"

"우리가 해왔던 기술들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어. 우리는 이미 재료를 모두 가지고 있다구. 요리만 하면 돼. 셰프들만 준비된다면."

"그래도, 체이. 문제는 돈이야."

"우리 재무상태로는 개발이 완료될거란 보장도 못해. 투자를 제대로 받는다고 해도..."

"세계최초야."

"뭐?"

"우리는 단순한 용역회사 에이전시로 남지 않을거야. 이걸 안하면 우리는 절대로 글로벌로 나아갈 수 없어. 우리는 이 디지털 플랫폼을 손에 넣어야 해. 우리 손으로 만드는, 아무도 만든 적 없는 디지털 왕국을 말이야."


모두가 말렸다.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인류의 영역을 확장시킨 모든 일은 처음에 다 미친 짓이었다. 디지털 테마파크. 나는 그저 사람들을 진심으로 놀라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요리가 완성될지, 사람들이 그 요리를 맛보았을 때 표정이 어떨지 그 자체에 손발이 떨리는 것이다.


나의 무모한 결정에, 긴 설득이 필요했지만 결국 대표들은 물론이고 직원들, 그리고 수많은 투자자들이 따라왔다. 그들과의 긴 항해가, 무사히 신대륙으로 상륙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였다.


밤이 길고, 또 길었다. 임시 전시장은 우리의 거대한 개발실이 됐다. 책상과 컴퓨터, 책상과 컴퓨터... 그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거대한 디지털 스크린. 어둠 속에 컴퓨터와 스크린에서 비춰나오는 푸른 빛들이 장관을 만들었다. 나는 전시장 사무실 한켠에 매일 해야 할 일을 엑셀로 정리해 걸어두었다. 완료된 일은 볼펜으로 그었다. 그 줄이 수천줄, 종이는 몇십 미터가 됐다. 근방 배달집 스티커는 온 벽면을 다 채웠다. 120여명이 함께 합숙을 하며 밤을 샜다. 불평하거나 도중에 포기하는 직원은 없었다. 모두가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잠은 가끔 책상에 엎드려서 잤다. 그때마다 같은 꿈을 꾸었다. 익숙한 전시장 입구, 그 입구로부터 길게 서 있는 사람들. 재잘재잘. 전시장에 들어간다. 우리가 몇날몇일 구상한 디지털 테마파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름답고, 전에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 입구를 지나면 사람의 모습을 본딴 아바타가 만들어지고, 그 아바타와 함께 테마파크 속을 탐험한다.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웃는다.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 어른들의 아이같은 웃음.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디지털 테마파크를 모두 완벽하게 구현하는데에는 애초 예상했던 90억원을 훨씬 넘는 150억원이 들어갔다. 150억원. 그 돈이 우리의 꿈에 붙은 가격표였다.


그리고, 드디어 테마파크가 개장했다.


최종 관객 스코어는 15만명. 40만명 정도가 손익분기점이었다. 실패였다. 모두가 실망했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10개월의 시간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괜찮아. 우리는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디지털 플랫폼을 만든거야. 이제 좋은 콘텐츠 업체를 찾아 수출하면 돼."

라고 나는 말했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이 투자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돈을 내놓으라고, 대표 자리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상관 없었다. 상관 없었지만 상관 있었던 것은 내 꿈을 따라준 모든 이들의 얼굴이다. 아이가 있고, 와이프가 있고, 가족이 있는 그 책임을 맡고 있는 직원들의 얼굴. 나를 신뢰한 댓가로, 그 꿈을 따라와준 사람들. 순수하게 나를 쫒아온 그 모든 얼굴이 세세히 떠올랐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내가 밀어붙인 고집과 아집이 그들의 미소를 배신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불쑥 불쑥 드는 것이다. 때때로 가슴을 옥죄어오는 울컥함과 함께.



나는 지금 직원들에게 메일을 쓰고 있다. 새벽 1시. 밤이 길다. 매일 꿈속에서 보았던 테마파크는 이제 사라졌다. 그 안에서 웃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나를 원망하는 사람들과 지독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던 창조물들은, 이제 더 이상 재잘되지 않는다. 책상 서랍에서 두통약을 꺼내 물과 함께 들이킨다.


메일을 몇번이나 썼다 지웠다. 썼다가, 또 지우고 눈을 한번 감고.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던 것들. 순금의 피라미드 아래로 흐르는 모래 조각들.


그 피라미드 위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세계의 문. 흐릿한 그 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인다.



*위 글은 실화를 모티브로 한 픽션입니다.

** 아래 기사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30000000685/3/70030000000685/20131016/582585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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