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멸망 단편
병문안을 갔던 것 뿐이다. 은혜는 동물 모양 잠옷을 입고 마중을 나왔다. 가로등 밑에 서자 은혜의 전신이 드러났다. 무슨 동물인데 그 동물이 얼룩말무늬인지 소무늬인지 분간이 안갔다. 언제인가부터 밤이 되면 눈이 침침해졌다.
가장 먼저 입술에 닿은 말은 나이 삼십에 무슨 동물잠옷이냐, 였지만 나이와 삼십 이라는 단어가 금지어에 올라있다. 필터링. 대신 다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라고 넌지시 말했다. 24시간 편의점에서 산 해열제 몇 알과 쌍화탕을 주머니에서 꺼내 무심한 듯 손에 쥐어줬다.
따뜻하다.
쌍화탕 팔백원. 팔백원으로 살 수 있는 것 치고는 나쁘지 않다. 얼룩이 가득한 동물을 뒤집어쓰고, 배시시 웃는 은혜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착한 아이다. 그래. 몸조리 잘하고... 난 간다. 손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비탈길 바닥이 꽤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런 엉거주춤 걸음에 점점 가로등의 노란 수혜에서 벗어나 어둠에 잠긴다. 어두워질 수록 편해지는 건 기분 탓인가.
라면 먹을래? 뒤돌아보니, 은혜의 두 손에 쌍화탕을 꼭 쥐고 있다. 꽉 쥐어있는, 쌍화탕이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릴때 오래된 성당으로 견학을 갔을 때 처음 봤던 성모마리아 조각상.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껏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의 손을 올렸던. 은혜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깊은 오르간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몇 발자국 차이에 그렇게 물끄러미 은혜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 끓여주면 나야 고맙지 라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란 조명도 그런 분위기에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조금은 성스럽게 보인 것에 대해 말이다. 네가 마리아같다는 이야기했던가? 세례명이 마리아인걸. 아, 그랬지. 다시 오르막을 오르며 말했다.
대체 집이 어디야? 조금 걸어야돼. 다소곳히 검은 긴 머리칼을 귀뒤로 넘기며 말한다. 머리칼을 넘기는 은혜의 손은 작고 하얗다. 감기나 걸린 주제에 장갑도 안끼고 다니네. 그녀는, 급하게 나오느라 못챙겼어, 라고 왠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런 표정에 도리어 내가 더 미안해졌다.
그녀를 잠자코 따라가다가 문득 기억났다. 며칠 전 만났던 정 선배 왈, 라면을 먹는게 중요한거다. 둘이서 소주 세병과 맥주 한병을 마신 후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아이까지 딸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말하는 거라고 몇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다가 인생 훅 갔지만, 이라고 다소곳이 말하는 것도 몇번이나 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라면이었다. 처음과 끝이 라면이었고, 그게 중요한 라임이라 그것밖에 기억이 안난다. 꼭 먹어야 한다고, 알았다고요 형님.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꽤나 숨이 찼다. 높낮이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날림으로 시멘트 처리하고 나머지는 로비용 뒷돈으로 쓴 게 분명했다. 그런 계단이었다. 하나하나 오르면서 또 하나하나 번뇌를 내려놓는 그런 108번뇌용 계단같다, 고 농담을 던지자 라면같은 그녀가 뒤돌아보면서 멋쩍은듯 웃는다. 재미가 없으면 정색을 하던가, 라고 생각했다. 사람좋은 은혜는 모든 것에 다 웃어준다. 그런 희망고문에 괜히 개그욕심에 생기고 농담을 자꾸 던지게 된다. 사실은 재미없는 사람인걸 나도 잘 안다. 그런 체념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뒷모습 위로 선배의 술 취한 얼굴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꼭 먹어! 나도 따라 웃었다.
계단을 다 올랐다. 운동은 하루에 손과 발을 놀리는 것밖에 없어서 심장이 꽤나 발작했다. 놀라서, 이게 지금 무슨 일이야. 미안해. 조금 무리했다. 다 오른 넓다란 평지엔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난간이 있었다. 강남의 야경이 한 눈에 보였다. 무척이나 높고, 높아보이는 것들이 이미 눈높이까지 올라와있다. 같은 높이인데 저쪽은 버튼 하나면 도달할 높이였다. 그녀는 길잃은 강아지마냥 두리번거리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일 마치고, 힘들게, 올라오면, 운동도, 되고 좋아. 여기로, 야경보러, 오는 사람도, 많다니까. 그녀는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이 힘에 부쳐보인다. 버튼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숨이나 골라. 잠시, 도시의 반짝이는 눈들 위로 은혜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집은, 조금 더 미로같은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야 있었다. 108 번뇌를 내려놓기도 전에 먼저 범죄 냄새 나는 붉은 가로등이 줄지어 사열하고 있었다. 여기를 매일 지나다녀? 이 시간에? 그녀는 응, 왜? 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누가 납치해가도 모르겠는데. 지금 나 걱정하는거야? 야, 나 이래뵈도 태권도 유단자야. 못건드려. 오기만 해봐. 내가 거시기를 꽉! 하면서 발차기를 해보인다. 그런 은혜를 보며 아하하 웃었지만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처자를, 그래도 세상 무서운 걸 조금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라면 먹으면서 방범에 중요성에 대해 설교해야겠다.
구석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반지하가 있다. 여기야. 앞만 보다 걷다간 전혀 발견하지 못할 그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개를 한껏 수그리고. 괜찮아. 가끔 쥐똥이 천창에서 떨어지기도 하는데 살만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라면 사가지고 올게. 뭐먹을래? 그녀의 말에 아니, 집에 라면도 없으면서 나를 초대했어? 라고 생각했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고 필터링.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 난 라면 별로 안 좋아해. 짜파게티로. 순간 꼭 라면을 먹어야 했던 것 아닐까, 하며 선배의 엄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큰 범주로 보자면 짜파게티도 라면 안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거나 그거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녀가 뒤뚱거리며 나갔다. 철커덩 하면서 철문이 닫혔다. 두걸음이면 꽉 찬 사각의 방 안에 오밀조밀, 있을 것은 다 채워놨다. 참 그녀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리번, 그러다 문득 쥐똥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 천장을 올려다봤다. 얼룩이 이상한 모양으로 져 있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싸보이는 벽지로 두른 천장이 마치 로르샤흐 테스트를 하는 듯 보였다. 음, 한번 해볼까. 등을 대고 누웠다. 정수리 위에는 퍼니셔의 해골 문양이 있었다. 그 문양 가운데 떨어지는 물기가 누군가의 피처럼 매달려 있다. 처음부터 해골 문양이라니, 이 집에 문제가 있는건지, 내 인식이 문제가 있는건지. 머리를 한번 긁적이다가 다른 곳을 찾아봤다. 옷장쪽에도 잔뜩 습기가 차있었다. 천사...모양처럼 보여 오, 이번엔 천사인가 하고 안심했는데 전신을 스캔하자 날개 잃은 천사였다. 게다가 요망한 표정으로 속옷차림새로 핀업걸 포즈를 하고 있었다. 입으면 두배로 커져요, 라는 광고문구는 써있지 않았지만 써있으면 딱이겠구나, 할만한 모양이었다. 오. 마. 이. 갓. 내 정신상태가 좀 그렇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천장습기 야매 테스트 대신 전문적인 진단이 필요해 보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냉장고 뒤쪽에는 미키마우스 모양이 숨어 담배를 피고 있었고, 싱크대 위에 번진 곰팡이 같은 것들은 3회전 말 무하마드 알리에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얻어맞고 난 뒤의 조지포먼 얼굴같은 모양이었다. 심드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여기 저기 흩어져있는 이런저런 모양들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에 본 인적성검사결과가 눈에 아른거린다. 자네는 우리 회사에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자네 사상이 불순하다는 뜻일세. 비유하자면 후쿠시마의 방사선 시금치처럼 말이야. 방사선 시금치같은 사상. 대체 그게 무슨 사상이지.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계속 생각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한가지 수확은 나라는 사람이 사회에 그리 걸맞지 않다는 것. 은혜 집에 놓인 수많은 결격사유들이 그런 생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나마, 문쪽으로 흘러가는 얼룩이, 언듯 봤던 요단강처럼 보인 것은 위안이었다.
늦은 여름 밤,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사거리의 교차 횡단보도를 걷는 도중이었다. 나는 고3이었고, 고3처럼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택시가 달려들었다. 캔디데이트, 캔디와 데이트를 하는 후보, 그러니까 후보. 캔디데이트, 캔디데이트, 캔디... 캔디와 데이트를 세번 채 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였다. 후에 알고 보니 택시에는 버스 기사가 타고 있었다. 무슨 일로 택시를 운전하게 됐나요, 라고 버스 운전수에게 물어보지도 못했다. 어찌됐든 나는 버스기사가 운전한 택시에 치였고, 붕 떠서 5미터 멀리 떨어졌다. 그렇게 머얼리 떨어져 가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이다. 그때 당시에 사과를 씹어먹던 한 중소기업의 음악기계로 다소 괴악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그 굵은 기타소리가 어린 천사들이 연주하는 하프처럼 느릿느릿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소리가 얼마나 들리나 싶더니, 눈 앞엔 긴 강 같은 게 펼쳐졌다.
강같은 은혜, 강같은 은혜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아이돌 후크송 같았다. 금새 중독되어 춤이라도 출 기세로 좌측 하단을 보니 제목이, 아 요단강이었다. 그 밑엔 깨알같은 천국 프로덕션. 그제서야 이 강이 그 유명한 요단강이구나. 노래방 번호가 뭐예요? 꼭 불러야지. 태초부터 인기곡 탑10을 놓치지 않는 곡이란다. 중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류의 은혜같은 유산이구나. 그럼 유튜브 조회수는 좀 나오나요? 싸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레이디가가 정도는 나와야 할텐데. 그래도 명색이 천국 프로덕션이잖아요. 금세 수긍했다. 요즘은 그런 시대지. 중엄한 목소리는 조금 힘이 빠졌다. 또 나는 물었다. 그럼 제가 죽은 건가요? 요단강 건너면 다시 못 돌아오는거죠? 요단강 은혜는 커녕 앞집 은혜 누나랑 사귈 수도 없는거죠? 물었는데 중엄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아드님은 한동안 깨어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응급실이었다. 응급실이였고, 어머니는 온 몸 성한 곳이 없는 나를 와락 껴안으며 하나님의 은혜야, 라고 대성통곡을 하셨다. 의사는 놀랬고, 기적이라고 했다. 팔을 쓰지 못하는 내게 미음을 떠먹여주시는 어머니께는 특별히 요단강 스토리를 들려드렸다. 어머니는 매우 좋아하셨다. 죽음에서 살려주셨다고. 죽음에서 살려주는 그런
요단강 같은 모양의 얼룩이 하나 보였다. 그런 희망찬 의미라면 타락한 천사니 해골이니 다 상쇄되겠지, 생각했다.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천장에 간당간당. 앗 쥐똥 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구부정한 자세로 은혜의 집을 둘러봤다. 천장 뿐 아니라 온 집안 구석을 메운 눅눅한 얼룩은 자신의 뿌리를 어딘가에 박고 가지를 뻗어가고 있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정체모를 생명 아래 살아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한쪽에 세숫대야 따위나 두는 일이였겠지. 역시나 구석에 똑 똑, 작은 대야 하나가 놓여있다. 가만보니 지붕에 물이 쿨렁쿨렁 가득 고여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아의 기분이 이런 것이였을까. 긴급 탈출용 방주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방주라도 만들어야지,
하고 한껏이나 허리를 굽이고 물이나 마실 요량으로 구석에 놓인 냉장고를 열어봤다. 순간 냉장고 깊은 구석에서 나를 노려보는 눈이 있는 줄 알고 흠칫 놀랐다. 아아, 그런 냄새가 났다. 노려보는 냄새. 오래돼 한껏이나 부패된 생선인데 그저 그렇게 얼어져만 있는 냄새. 한껏이나 품고 있는 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울만큼인데, 그래도 나 싱싱해 잘 살고 있다고, 보란듯이 말하는 듯 했다. 봉인된 냄새를 실온으로 연다면 폭발하겠지, 내 코는 못 속여, 하며 태평양 어딘가에서 부모와 생이별한 생선에게 말한다. 자세히 살펴보자 하나같이 봉지에 싸여 있었다. 이것은 음, 대체 뭘까, 냉장고 바닥에 붙어 들수조차 없는 반찬통이 여러개 자리잡고 있었다. 몇번 들어올리려다 포기하고, 손바닥 냄새를 한번 쓱 맡았다. 그런 냉동된 악취는,
여자라서 행복해요
옛날 티비에서 했던 냉장고 광고가 떠오르게 했다. 광고 속 여자는 부엌에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냉장고를 연다. 그 안은, 원래 냉장고를 발명한 누군가가 그래, 이거야! 박수치며 좋아할만큼 모범적인 배열을 자랑하고 있다. 문쪽은 각종 음료수로 가득 차있고, 안쪽은 차곡차곡 쌓인 깔끔한 반찬통, 싱싱한 야채들, 간식들이 있다. 왜 우리집 냉장고엔 맛있는게 없어? 어린 나는 알면서도 그렇게 물어봤다. 어머니는 달달한 건 몸에 안좋아 라고 하셨다. 가끔 오셨던 할머니를 졸랐다. 우리집은 맛있는게 없어요. 할머니는 웃으며 그 광고 속처럼 냉장고를 가득 채워주셨다. 할머니는 고작 부모님께 얼마 받은 용돈으로 손주 먹을 것 사준다고, 행복했다. 나는 과자를 먹어서 행복했다.
그녀는 행복할까.
그런, 멍청해보이는 생선이 있는 냉장고 앞에서 중얼거렸다. 그때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녀였다. 물에 들어갔다나온 강아지가 몸 털듯이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차. 그녀는 지금 아프지. 내가 이래서 지금까지 솔로야. 서둘러 그녀 손에 든 검은 봉다리를 받아든다. 미안, 누나 아픈데 미안하네. 너 이럴때만 누나지. 은혜가 덜덜 떨며 웃는다. 내가 라면 끓일게. 앉아있어. 몸 좀 녹여. 알았어. 동생이 끓인 라면 좀 먹어보자. 은혜는 구석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펴고 얼굴만 내민채 그 안에 쏙 들어간다. 그런 은혜를 뒤를 두고 냄비에 물을 받고, 라면 봉지를 뜯고...
지금 유성 떨어지고 있던데.
응? 동그란 은혜의 얼굴이, 지금 유성 떨어지고 있더라고. 그거 보고 오느라 늦었어. 유성이? 뉴스에 그런 말 없었는데. 나는 봉지를 뜯다말고 문을 열고 바깥 하늘을 올려다봤다. 유성. 하나가 아니었다. 유성우였다. 밤하늘에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은혜가 이거 물 끓는데? 라면 넣을까? 라고 말했다. 아, 이건 내가 끓여야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스렌지 앞에선 은혜를 다시 앉혔다. 그런데 저거 뭐야? 뭐긴 뭐야 유성이지. 은혜가 심두룽하게 대답한다. 저렇게 비처럼 쏟아지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래. 나도 처음봐. 처음 본다는 말에 라면 스프를 넣다가 은혜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 유성 보면서 라면 먹을래? 아, 정말? 그러자 그럼! 옥상 올라가면 되겠다. 옥상도 있어? 사실 집 주인 허락 맡아야 하는데, 내가 예전에 복사해둔 열쇠있거든. 올라가도 돼. 은혜는 마치 초등학생처럼 들떠있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어. 옷 두껍게 입어. 나는 라면상 차릴게. 오키도키.
양은냄비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짜파게티 2인분, 죽음의 냉장고에서 나온 김치. 됐다. 완벽한 유성우 레시피다. 작은 상을 가지고, 은혜가 열어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건물 옆에 난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정말 옥상이 있었다. 사방에 빨랫줄 줄이 있었고,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었다. 솔직히 낭만적인 공간은 아니였다. 중간에 작은 마루가 있어, 상을 올려다놓았다. 동물 잠옷에, 점퍼를 껴입은 은혜도 그 옆에 앉았다. 불기 전에 얼른 먹자. 응. 짜파게티 한 줄 먹고, 하늘을 쳐다보니 정말 라면 면발 같이 기다란 꼬리를 가진 유성이 줄줄이 떨어지고 있었다. 와, 정말 예쁘다. 아름다워. 이런 거 진짜 처음 봐. 고개를 돌렸다. 은혜는 입가에 짜파게티 소스를 잔뜩 묻혀놓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이뻐보였다. 이런,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더라도 은혜니까. 강같은 거지.
은혜야. 응. 라면을 한 젓갈을 후루룩. 분위기도 못잡아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불렀다. 은혜야. 왜. 아니, 그냥.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좋아서. 그러자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 녀석이 무슨 수작이야? 수작은 무슨 난 순수해. 순수는 무슨. 그러면서 은혜는 껄껄껄 웃어댔다. 그런 호탕한 웃음에, 나는
그냥 은혜 네가 내 여자친구였으면 좋겠어
그 웃음 속에 그런 말을 했다. 은혜는 웃다가, 막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그쳤다. 나는 멋쩍은 마음에 라면을 먹었다. 그러고서는 하늘을 봤다. 은혜가 나를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그리고, 미소짓는게 느껴진다. 나는 용기를 냈다. 젓가락을 들지 않는 손으로 은혜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어맛, 얘가. 장갑도 안챙기고. 그렇게 내가 말했는데. 춥잖아. 더 아프지않으려면 가만 있어. 그렇게 말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면발같은 유성우가 떨어지고 있었고, 그녀의 손은 조금씩 녹아갔다.
그 와중에, 라면을 다 먹지도 않기도 전에, 선배가 말한 라면의 역사를 세우기도 전에. 방범의 중요성을 얘기하기도 전에. 습기가 가득찼다고, 쥐똥을 치워주고 냉장고 정리를 다시 하기도 전에 눈 앞에 섬광이 비췄다. 한 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느껴진 것이 스파게티의 맛이 아닌 은혜의 차가운 손이라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눈을 뜨자, 요단강 앞에 서있었다. 나뿐 아니었다. 은혜도 있었다. 은혜 뿐 아니었다. 마치 지구의 모든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은혜에게 말했다. 우리 죽었나봐. 그러게. 유성이 아니였어. 운석이었구나. 어깨 한번 으쓱하고, 그래도 죽기 전에 너한테 고백해야지 했는데 다행이야. 고마워. 은혜가 대답했다.
은혜와 나는 손을 잡고, 그렇게 요단강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