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하던 지난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엄마에게 위로가 되어드리고 싶었다. 각자의 상실감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한 나는 철없던 손으로 엄마의 등을 어루만지거나 안아주며 엄마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어주기를 기대했다.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빠서, 나랑 같이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네. 그런 추억이 없다. “
그 후, 아쉬움 가득하던 엄마는 영화표를 예매해 우리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언젠가 우리가 엄마를 떠올릴 때는 추억을 가득히 남겨주고 싶던 것처럼. 그렇게 봤던 영화가 ‘빌리지(2004)’와 ‘친절한 금자씨(2005)’였다. 사실 내가 제일 처음 엄마와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는 ( ‘영구와 황금박쥐’류를 제외하고 ) ‘사랑과 영혼(1990)’이었다. 어린아이와 같이 보는 영화는 아닐 것이고, 엄마가 친구들이랑 영화관을 가는데 내가 동참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어린 나이에 뭘 알겠냐마는 남녀 주인공이 물레를 같이 돌리던 장면과 여주인공인 데미무어는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특히 그녀의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는 장면은 잊히지가 않았다. 열 번 넘게 본 영화들 중 하나가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 와 ‘노팅힐(1999)‘인데, 엄마와 같이 봤던 ’ 사랑의 영혼‘의 영향인 듯 나의 취향은 확고한 로맨스/멜로 영화이다. 특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막연히, 엄마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방학 때면 비디오 가게에서 디즈니 만화 영화를 빌려 늘어지도록 함께 보았던 기억을 되살리며, 함께 봤던 ‘사랑과 영혼’을 떠올리며 내 멋대로 넘겨짚었다. 그렇게 평생 엄마가 로맨스 영화를 좋아할 거라 생각하며 살아갈 뻔한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 엄마가 나의 산후조리를 도와주시러 미국에 2달 동안 방문해 주시기로 한 것이다. 20살 이후, 엄마와 낮밤을 붙어 지내며 함께하던 적이 있었을까? 산후조리라니! 이 얼마나 합당해 보이는 사유인가!! 고생하실 엄마보다, 엄마랑 그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철없는 딸은 마냥 설레기만 했다. 두 달 중, 한 달은 내가 아파서 엄마와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남은 한 달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엄마가 처음 보는 미식축구에 묘한 흥미를 가지신다는 걸, 총과 칼들이 나오는 격한 액션 영화를 좋아하신다는 걸. 그것도 엄마가 ‘존윅’을 좋아해서 나오는 시리즈마다 찾아보신다는 사실을 남편을 통해 들었다.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모르는 사실을 남편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때로는 남이 낫다더니,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나는 매번 왜곡하며 바라보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도 계절에 따라 매번 모습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사람은 찰나마다 다르지 않을까. 어제랑 오늘이 다르고, 오늘이랑 내일이 다르다는 걸 모르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아쉽기만 하다. 내 이야기만 하지 말고, 엄마 이야기를 더 들어볼걸. 더 찬찬히, 세세히 들여다볼 걸. 너무나 예쁘던 마음결들을 하나씩 들쳐볼걸. 왜 그렇게 오만하게 한 사람을 단정 지으며 살아왔을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야 오만하던 나를 되돌아보게 되다니. 후회만큼 아쉬운 게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내일은 조금만 덜 오만해져야지. 남은 내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해야지.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봐야지…… 서둘러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