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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색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

천체복사의 종류 (2): 흑체복사 (blackbody radiation)

by astrodiary

가속하는 전자들이 방출하는 복사에 이어 이번에는 흑체복사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흑체는 물리학자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으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왜 이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도입해야만 했을까?


우리가 눈으로 어떤 물체를 볼 수 있는 이유는 그 물체가 우리 눈의 감각세포가 인지할 수 있는 빛을 '보내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내온다'는 말은, 반사방출,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밝은 대낮에 보이는 대부분의 물체들은 태양빛을 반사시키고 그 반사된 태양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인데, 빨간색 빛을 반사하는 물체는 빨간색으로, 파란색 빛을 반사하는 물체는 파란색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19세기말에 이미 물리학자들은 물체 자체도 스스로 빛을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방출된 빛의 연속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그 빛이 매질을 통과해 올 때 그 매질에 의해 생기는 흡수선을 관측하는 일은 물체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고. 결국에는 이 연구들이 확장되어 20세기 초 양자물리학이 확립되었다.


다시 흑체복사로 돌아가서, 아래 사진에서 우리는 뜨겁게 달구어진 쇳물이 주황색 빛을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위의 불을 끄고 (반사될 수 있는 광원을 차단하고) 보아도 여전히 쇳물은 주황색이다. 즉 이 쇳물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황색의 빛을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런 물질 자체의 특성을 연구하려면 관측된 빛이 반사에 의한 영향이 전혀 없는 온전히 방출에 의한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반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가상의 물체가 바로 흑체이다. 흑체는 말 그대로 '검은'색을 띤 물체를 가리킨다. 모든 빛이 반사 없이 흡수되면 검은색을 띠기 때문에 이 가상의 물체에 흑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b48a6be1944c4c6071fafeb8b21c658a.jpg 출처: 게티이미지

그렇다면 왜 위의 쇳물은 주황색을 띠는 것일까? 이유는 바로 쇳물의 온도 (약 섭씨 2000도) 때문이다. 결론 부터말하자면, 흑체가 내는 연속 복사의 스펙트럼 (파장에 따른 에너지 밀도값)은 흑체의 온도 만으로 결정된다. 19세기말 물리학자들은, 일정 온도를 가지는 물체에서 나오는 빛을 관측하여 얻어낸 스펙트럼에 들어맞는 이론적 모형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기존에 알려져 있는 물리 지식으로는 모든 파장에서 잘 들어맞는 모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막스 플랑크가 기존의 모형을 약간 변형하여 관측 자료를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함수를 만들어 내었는데, 바로 아래 그림에 보이는 흑체복사 함수이다 (흑체복사 함수를 알아내게 된 과정과 이것이 나중에 현대 물리학에 미친 영향은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의 얘기 거리이므로 여기서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다).

blackbody_spec.png 주어진 온도에 따른 흑체복사의 스펙트럼. 출처: https://namu.wiki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하얀 선들은 주어진 절대 온도를 가지는 흑체가 방출하는 에너지밀도를 나타내는 흑체복사 함수이다. 흑체가 뜨거울수록 에너지밀도는 전체적으로 증가하며 주목할 점은 가장 큰 에너지 밀도를 가지는 복사가 방출되는 파장이 온도가 높을수록 점점 더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림에 보이는 무지개 색은 실제 우리가 보는 가시광선 영역의 파장대에서 나오는 빛이다. 자, 3500도짜리 흑체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내는 파장은 무지개의 빨간색 영역에 위치하고 5000도짜리 흑체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내는 파장은 무지개의 노란색 영역에 위치한다.


실제 태양 광구(표면)의 온도가 약 6000도 정도임을 감안하면 (내부의 온도는 이보다 훨씬 더 높다, 하지만 우리는 태양의 광구에서 나오는 빛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음,,, 또 글이 길어지므로 나중에 얘기하기로 한다) 태양빛이 주로 노란색을 띠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사람의 체온이 약 36도 (절대온도로는 약 300도)라고 하면, 사람이 내는 흑체복사 함수는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가장 많은 에너지를 내는 파장은 이제 가시광 영역을 벗어나 더 긴 파장영역 (적외선)으로 옮겨 간다. 여러분과 필자가 암실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보자, 암실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를 볼 수가 없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우리 몸이 반사시킬 수 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300도인 우리 몸은 흑체복사와 유사한 형태의 스펙트럼을 가지는 연속 복사를 방출하지만 그 빛은 가시광에서 멀리 벗어난 적외선 영역에서 대부분 방출되기 때문에 태양빛에 맞추어 진화한 우리 눈이 검출할 수 없는 빛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이 무지개 색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우리 눈이 볼 수는 없지만 이 세상 모든 물체 (그리고 천체)는 각각의 온도에 해당하는 흑체복사를 방출하고 있으며, 물체의 온도가 낮을수록 긴 파장에서, 물체의 온도가 높을수록 짧은 파장에서 주로 대부분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글의 초반에서, 흑체는 실제 존재하기 않는 가상의 대상이라는 말을 했었다 (실제로는 물성의 차이 때문에, 완벽한 흑체복사를 방출하는 물체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천체로 대상을 전환하면, 흑체복사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천체는 바로 별이다. 그러나 궁극의 흑체는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나온 배경복사이다. 1990년 코비 인공위성이 관측한 아래의 우주 배경 복사는 절대 온도 2.735도의 온도를 가지는 흑체가 내는 흑체복사와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 측정 오차가 너무 작아서 확대된 이미지에서도 볼 수 없으며, 또한 관측 데이터 (작은 사각형 기호)를 이론 곡선 (실선으로 나타낸 흑체복사 함수)으로 부터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주는 정말 경이로운 존재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우주 안에 살고 있는, 우주를 이해하는 우리 인간들이다.

CMB.png 우주배경복사 스펙트럼. 출처: https://ui.adsabs.harvard.edu/abs/1990ApJ...354L..37M/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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