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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 속의 천문학

강착원반 (accretion disk)

by astrodiary
세면대에 물이 빠지는 모습: 이미지 투데이

강착원반 (accretion disk)이라는 말은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천문학에서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단어들 중의 하나다. 원반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강착 (降着)이라는 말은 '내려앉아 (내릴 강, ) 달라붙는 (붙을 착, 着)' 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강착원반은 어떤 물질이 내려앉아 달라붙어 형성된 원반이라는 뜻이 되겠다.


물질이 내려앉아 달라붙어 원반을 형성하려면 중심에 있는 어떤 것이 주변 물질을 끌어당겨야만 할 것이다. 중심에 있는 그 "어떤 것"은 별일 수도 있고, 별이 죽고 난 후 생겨난 블랙홀 일 수도 있고, 은하 중심에 있는 초거대 질량 블랙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강착원반은 그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천문학에서 굉장히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강착원반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한다.


강착원반에 내려앉는 물질들은 중심에 있는 물체 주변의 가스입자 들이다. 처음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서서히 중심부로 모여드는 가스는 위의 그림에서 보이는 세면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중심부로 흘러들어온다. 이때 원반에서 회전하는 가스 입자들은 각운동량이 보존된다고 가정하면 (중심에서부터의 거리 r에 속도 v를 곱한 값이 일정하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r이 작으면 v가 커져야 하므로)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느리게 회전한다 (r이 커지면 v가 작아져야 하므로). 이렇게 중심에서부터의 거리에 따라 서로 다른 회전 속도를 가지게 되면, 근접한 거리에서 회전하는 가스 고리들은 서로 다른 속도 때문에 부대끼게 되고 마찰을 겪게 된다. 마찰은 열을 발생시키고, 열을 받은 가스고리들은 각각의 온도에 해당하는 흑체복사를 내게 된다. 일반적으로 강착원반은 중심으로 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


이제 아래의 그림과 같은 동심원을 생각하고 이 동심원들이 더해진 원반을 강착원반이라고 생각해 보자. 중심에 가까운 동심원 (보라색)은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를 가지므로 흑체복사의 에너지는 주로 높은 주파수에서 나오고 (보라색 스펙트럼), 중심에서 먼 동심원 (빨간색)은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를 가지므로 흑체복사의 에너지는 주로 낮은 주파수에서 나온다 (빨간색 스펙트럼). 이제 각각의 동심원의 온도에 해당하는 흑체복사의 스펙트럼을 구해서 더하면 강착원반 전체에서 나오는 복사에너지 스펙트럼을 계산할 수 있다.

Screenshot 2025-07-11 at 10.00.33 PM.png 강착원반 모형과 에너지 스펙트럼. 출처: http://spiff.rit.edu/classes/phys372/lectures/agn_ii/agn_ii.html

물론 실제 강착원반이 어떻게 생겼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그곳에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종종 여러 가지 가정에 기반한 아주 간단한 모형에서 시작하여, 가정을 하나씩 없애가며 점점 실제와 같은 그럴듯한 모형을 만들어간다. 예를 들어 위의 간단한 강착원반 모형은 원반이 아주 얇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원반두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에너지 생성과 전달의 특성변화를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강착원반은 무시할 수 없는 두께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그렇다면, 반경에 따른 성질 변화뿐아니라 원반의 수직 구조를 따라 변하는 성질들도 고려를 해야만 한다. 또한 강착원반은 자기장을 띠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기장도 고려를 해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점점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게 되면 더 이상 종이와 연필만 가지고는 계산할 수 없고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 모의실험을 해야만 한다. 대용량의 계산이므로 이런 연구를 하려면, 천문학뿐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잘해야 하고 컴퓨터 구조나 알고리즘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야 한다. 그래서 대용량 수치모의실험을 하는 천문학자들은 컴퓨터 관련 고급 스킬을 요구하는 다른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리하자면, 강착원반은 물질의 중력에너지를 마찰에 의한 열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을 통해 빛을 방출한다. 천문학에서 대부분의 경우 에너지의 원천은 중력에너지이지만 중력에너지 자체가 빛을 낼 수는 없으므로 (하지만 중력파의 형태로 에너지 방출이 가능하다) 중력에너지를 어떻게든 빛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강착원반이 한 예이고 다른 예로는 중력에 의해 뭉쳐진 가스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으로 빛을 내는 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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