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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모의실험의 원조

에릭 홈버그의 전구를 이용한 모의실험

by astrodiary
BT3-gallery-plot.png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은하형성 모의실험 (https://bluetides.psc.edu/)

천문학에서는 관심 있는 대상을 가지고 실험을 하거나 대상을 직접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모의실험은 오늘날 천문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위의 그림은 은하 형성과정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의 실험한 결과이다. 단순히 보기에 예쁜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물질들 사이의 중력과, 유체역학, 자기장과의 상호작용 등을 모두 고려한, 엄밀한 (그 엄밀함의 기준은 컴퓨터와 알고리즘의 성능이 향상됨에 따라 점점 상향 조정된다) 계산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이다. 오늘날 천문학자들이 어떻게 이런 모의실험을 하는지, 그 이면에는 어떤 원리가 숨어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만, 필자는 반대로 이러한 현대 천문학의 최전선에 있는 수치모의실험 연구를 가능하게 한, 그 기원이 되는, 약 85년 전에 발표된 연구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1941년 국제 천체물리학 저널에 스웨덴 천문학자 에릭 홈버그 (Erik Holmberg)가 한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제목은 "새로운 계산법을 이용하여 실험실에서 재현한 모형 항성계의 충돌과정"이다. 제목을 보면 일단 중력 (유체역학과 같은 다른 힘은 고려하지 않았다)의 지배를 받는 두 항성계 (은하라고 생각해도 좋다)의 충돌 과정을 모의 실험한 연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새로운 계산법'으로 소개된, 저자가 고안한 방법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잘 말해주듯이, 한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은 그 물체 주변에 있는 각각의 물체가 미치는 중력의 합이며, 그 각각의 물체가 미치는 중력은 그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고 중력이 작용하는 물체까지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원칙적으로는 어떤 물체에 가해지는 중력을 계산하려면, 주어진 물체 주변의 모든 물체들이 미치는 중력을 계산하여 더하면 된다. 이제 그렇게 얻어진 중력으로부터 F=ma를 이용하여 가속도를 구하고 그에 맞추어 짧은 시간 동안의 속도변화를 계산하여 그 속도에 따라 물체를 조금씩 움직인다. 이 일을 짧은 시간간격으로 반복하면 우리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 항성계를 이루는 각각의 별들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수의 물체들로 이루어진 항성계의 경우, 매 순간 주변 물체의 중력을 일일이 다 계산하여 더하는 일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다. 1000개의 별로 이루어진 항성계의 경우, 매 별마다 999개의 주변별들의 중력을 계산해야 하고 그 일을 1000 개의 별에 대해서 반복해야 하므로, 1000*999=999000번의 연산을 해야 한다. 하물며 10-100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의 경우라면, 컴퓨터와 똑똑한 알고리즘의 도움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1941년에 발표된 이 연구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요한 특성을 이미 예견하고 있다.


최초의 전자식 진공관 컴퓨터로 알려진 에니악 (ENIAC)이 1946에 출현하였으니 1941년에 발표된 이 논문에서 말한 '새로운 계산법'은 당연히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은 아니었을 터. 과연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을까? 힌트는 위에서 언급한 중력의 성질에 있다. 홈버그는 전구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항성계를 이루는 각각의 별을 전구로 대체하고 각각의 전구의 밝기를 별의 질량에 비례하도록 조정하였다 (밝은 전구는 무거운 별, 어두운 전구는 가벼운 별). 똑같은 밝기의 전구라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밝기가 줄어드는 점은 중력의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약해지는 것과 똑같다.

Screenshot 2025-08-24 at 5.18.45 AM.png 홈버그가 전구들로 만든 은하 모형

위와 같이 홈버그는 37개의 전구를 이용하여 은하 하나를 만들었다. 중심부에 있는 전구들은 밝게, 주변의 전구들은 어둡게 조정하여, 그 당시 알려진 은하의 질량 분포를 모사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각각의 전구들에 회전속도를 주어 은하의 회전을 모사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은하 하나를 더 만든 후, 두 은하에 초기 속도값을 주어 두 은하를 접근시켰다. 이렇게 하면 각각의 전구의 주어진 초기 속도를 이용하여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전구들의 위치를 업데이트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약간 바뀐 위치에 있는 전구들이 느끼는 중력을 계산하여 각각의 전구에 가해지는 가속도를 구한 후 속도를 업데이트하고 그에 따른 위치를 바꾸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매 순간마다 각각의 전구에 가해지는 중력을 계산하는 일이었다.


홈버그는 각 전구 옆에 조도(照度) 센서라고 불리는 센서를 달아 빛이 세면 저항이 줄어들고 (전류가 증가한다), 약하면 저항이 늘어나도록 (전류가 줄어든다) 한 후, 그 빛의 세기에 따른 전류의 변화를 정량화해서 잴 수 있는 검류계를 하나 더 붙였다. 그렇게 하면 각 전구가 받는 빛의 양을 정량화할 수 있고 각각의 전구마다 그 주변의 모든 전구들로부터 도달한 합산된 빛의 세기를 잴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번 전구에 작용하는 중력은, 2번부터 37번까지의 전구들에서 출발하여 1번 전구에 도달한 빛의 세기를 재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중력과 같은 성질을 가지도록 고안된 이 전구들에서 나오는 빛의 세기를 이용하면 각각의 전구에 가해지는 주변 전구들에 의한 중력의 세기를 한 번에 잴 수 있고 (주변에 있는 전구들에서 나오는 빛의 세기를 일일이 재서 더할 필요가 없다) 이를 이용하며 매 순간 전구들의 위치를 업데이트할 수 있다 (홈버그는 실제로 이렇게 전구들의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였다). 정말이지 기발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Screenshot 2025-08-24 at 5.48.29 AM.png 홈버그의 은하 충돌 모형 (회전 방향과 접근 방향의 속도가 다른 두 가지 경우에 대한 결과)

이와 같이 매 순간 전구들의 위치를 업데이트하여 얻어진 두 은하의 충돌 모의실험의 결과(위의 그림)는 조석꼬리 (tidal tail) 모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모양은 오늘날 최신 컴퓨터로 구현한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의 충돌 모의실험 결과 (아래그림)와 크게 다르지 않다. 85년 전의 결과, 그것도 컴퓨터의 도움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6853660.1.jpg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의 충돌 모의실험

홈버그의 연구 이후, 컴퓨터가 과학연구에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중력 계산은 수학적으로 휠씬 빠르고 정밀한 수치계산으로 대체되었고 이를 수행하는 알고리즘도 몇 번의 혁신적인 진보를 하였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85년전 컴퓨터가 없던 시절 홈버그가 고안한 전구를 이용한 모의 실험은 오늘날 기준에 따라 다순히 구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여전히 배울점이 있는 훌륭한 영감을 주는 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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